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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 답사 이야기/경주 문화유산 답사, 여행

경주 남산 석가사지와 불무사지 # 경주 남산 석가사지와 불무사지 "폐하도 진신석가를 만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서기 699년, 신라의 효소왕은 당나라 황실의 복을 빌려고 지은 망덕사의 낙성회에 참석하였다. 왕실이 직접 돈을 내서 만든 절이니 생색도 낼 겸 시간을 내서 화려하게 행차했을 것이다. 그때 행색이 거의 거지꼴인 승려 한사람이 몸을 구부리며 들어와 왕에게 요청하였다. “빈도도 이 재에 참석시켜 주십시오.” 왕은 끝자리에 앉도록 허락하였다. 마음속으로야 탐탁치 않았겠지만, 겉으로는 왕의 관대함을 보여 줘야 했을 것이다. 행사가 끝나자 왕은 가벼운 마음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파암에 있습니다.”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게나.” 그러자.. 더보기
첨성대의 수수께끼 -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가 # 첨성대의 수수께끼 -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가 10월 핑크뮬리가 한창일 때의 풍경 첨성대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 첨성대는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중 하나이며 국보 제 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첨성대를 한번쯤은 실물로 보았을 것이다. 2016년 9월, 진도 5.8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 첨성대의 균열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문화재 관리 당국은 첨성대 위쪽 정자석(井字石)이 북쪽으로 3.8cm 정도 이동했을 뿐, 큰 훼손은 없었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첨성대는 오늘날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식될 정도로 전국구의 명성을 갖고 있는 유명한 문화유산이다. 숭례문 화재 당시 수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했듯, 만약 첨성대가 붕괴되기라도 한다면 숭례문 화.. 더보기
경주 남산 천룡사지 - 신이한 절터, 우뚝한 삼층석탑 # 경주 남산 천룡사지 - 신이한 절터, 우뚝한 삼층석탑 고위봉이 올려다보이는 천룡사지 삼층석탑 “계림의 땅에는 객수 두 줄기와 역수 한 줄기가 있는데,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하늘의 재해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이 있을 것이다. 역수는 주의 남쪽 마등오촌 남쪽으로 흐르는 냇가인데, 그 근원이 천룡사이다. 중국에서 온 사자 악붕귀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이 파괴되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에 나오는 천룡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룡사지 가는 길. 천룡사지는 경주 남산에서 드물게 넓다란 산중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악붕귀는 신라와 당나라가 붙었던 나당전쟁 당시 신라의 의도를 염탐하려고 당에서 보낸 사신이다.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고 .. 더보기
복원된 경주 월정교의 야경을 보다 # 복원된 1,300년 전 경주 월정교의 야경을 보다 달이 뜬 월정교. 마치 종이를 접어놓은 듯, 아래위가 똑같은 모습이다. 2017년 10월 31일부터 11월 3일까지 제 14차 세계유산 도시기구 경주 총회가 열리고 있는데, 이 기간 동안 복원 중인 월정교를 개방하였다. 오전 9시~오후 5시까지 임시로 개방하고 있는 월정교는 사실상 복원 공사가 거의 끝나 조만간 정식 개방을 할 것 같다. 최근 몇 년간 월정교 공사가 진행 중일 때 언제 다 만들어지나 꽤 기다렸다. 교촌 한옥마을에 갈 때마다, 경주국립박물관에 갈 때마다 지나면서 공사 중인 현장을 슬쩍 보곤 했는데, 이제 임시로라도 오픈한다니 안 가 볼 수 없다. 국제 행사 때문에 좀 서둘렀다는 느낌인데, 일단 건물 자체는 다 되었지만, 주변 정리가 덜 .. 더보기
괘릉(원성왕릉) - 볼거리 많고 분위기 좋은 화려한 왕릉 # 괘릉 (원성왕릉) - 볼거리 많고 분위기 좋은 화려한 왕릉 통일신라 선덕왕 때 진골 귀족이자 이찬이었던 김경신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머리에 쓴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썼는데, 갑자기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는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그는 점쟁이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벼슬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들었다는 것은 칼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갔다는 것은 감옥에 갈 조짐입니다.” 그는 이 말에 충격을 받고 근심하여 병을 핑계로 집안에 근신하였다. 괘릉(원성왕릉) 진입로 그런데 당시 아찬 여삼이란 사람이 굳이 찾아와 해몽을 다시 해 주었는데, “이는 정말 상서로운 꿈입니다. 복두를 벗은 것은 더 높은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흰 갓을 쓴다는.. 더보기
경주 서출지와 카페 서오 - 사급갑의 전설이 서린 여름 연못과 운치 있는 한옥 브런치 카페 # 경주 서출지와 카페 서오 - 사금갑의 전설이 서린 여름 연못과 운치 있는 한옥 브런치 카페 산 자체가 야외 박물관이라 부를 정도로 온갖 문화재와 유적이 몰려 있는 경주 남산 아래 동쪽 기슭 조용한 분위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연못이 서출지이다. 풍천 임씨 소유인 이요당이라는 제법 오래된 정자 앞에 있는 연못인데, 1664년 임적이 세웠다. 지금도 이 일대는 풍천 임씨의 집성촌으로 남아 있다. 정자 앞 좁은 마당에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듯한 연꽃 대좌가 1개 놓여 있다. 정자에는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다. 사적 제138호. 이 서출지(書出池)라는 이름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전한다. 여름 서출지 (아래 위)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소지마립간 10년(488년) 때였다. 왕이 천천정에 이르렀을 때 쥐와 까.. 더보기
경주 기림사 – 명품 계곡을 안고 있는 호젓한 사찰 # 경주 기림사 – 명품 계곡을 안고 있는 호젓한 사찰 기림사 옆 계곡 풍경 “외지인들은 감은사, 대왕암에 가고, 우리 경주 사람은 기림사로 오는 기라.”기림사에서 만난 60대 할아버지 내외의 말이다. 경주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경주를 여행하는 여행객들은 그리 잘 모르는 사찰이 기림사이다. 꽤 큰 사찰이고 분위기도 있으며, 역사도 깊은 곳이지만, 신라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적은 데다 경주의 중심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 유명 관광지로 소문나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보물로 지정된 문화유산만 4개가 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유적지이다. 게다가 기림사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개울과 숲 풍경은 명품이라 해도 괜찮을 정도로 그윽하고 분위기가 있다. 내가 기림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문화유산보다 이 분위기와 풍경 때.. 더보기
김유신 묘 - 신라를 대표하는 명장의 당당한 무덤 # 김유신 묘 - 신라를 대표하는 명장의 당당한 무덤 신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역사 인물 하면 김유신을 떠올릴 것이다. 요즘이야 김유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져 예전 같은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신라 삼국통일의 명장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1400년 전의 인물 치고는 역사 기록도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어 그의 일생이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당시 신라 지배층 내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그가 어떻게 비상한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발휘하며 최고 권력에 근접하였고 결국 영광스럽게 죽었는가는 오랫동안 정치인, 경제인들에게 하나의 텍스트로 남아 있었다. 경주 시내 외곽에 있는 수많은 무덤들 중 왕릉이 아니면서도 왕릉 대접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있는 무덤이 김.. 더보기
경주 무장사지 - 평화를 상징하는 경주 근교의 깊은 사찰 # 경주 무장사지 - 평화를 상징하는 경주 근교의 깊은 사찰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밤하늘 별처럼 깔려 있는 경주 일대에서 가장 호젓하고 조용한 유적지를 찾아가자면 무장사지를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태종 무열왕이 전쟁이 끝난 후 무기와 병장기를 깊이 감추어 두었다는 무장계곡, 그 길로 호젓한 발걸음을 옮기면 그윽하게 감추어진 절터에 닿는다. 무장사지의 소중한 점은 경주 일대에서 드물게 수량이 풍부한 긴 계곡을 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많은 유물, 유적을 품고 있는 경주 남산에서는 이런 계곡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무장사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3km에 가까운 계곡길을 걸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걷기 코스가 된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은 때로 계곡을 건너면서 징검다리를 만나기도 한다. 계곡에 .. 더보기
경주 월성 (반월성) - 위풍당당했던 신라 천년의 궁성 # 경주 월성 (반월성) - 위풍당당했던 신라 천년의 궁성 4월 유채꽃이 핀 월성 북쪽 풍경 복원된 월성 해자 신라 천년의 수도가 경주였다면 신라 천년의 궁성은 어디에 있었으며, 왕은 어디에 살았을까. 그 대답은 “월성”이다. 본래의 명칭은 월성이지만, 전체적인 모양새가 반달의 형태를 띠고 있어 요즘은 일반적으로 반월성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경주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치우쳐 있는 반월성은 명실공히 신라의 궁궐이 있던 곳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반월성은 101년(신라 파사왕 22년)에 처음 쌓아 국왕이 금성으로부터 거처를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금성의 위치는 조선시대 ‘읍성의 동쪽 4리에 흙으로 쌓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는 위치를 알 수 없다. 월성을 쌓은 뒤부터 신라 왕..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