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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 이야기

평화의 소녀상 답사 – (6) 군산 평화의 소녀상 # 평화의 소녀상 답사 – (6) 군산 평화의 소녀상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지금도 세워지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답사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필자만의 평화적인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이 사회의 여러 노력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 더보기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 (5) 안동 평화의 소녀상 #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 (5) 안동 평화의 소녀상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고자 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저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는 내 나름의 재능 기부 방식이다. 단,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더보기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 (4) 여수 평화의 소녀상 #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 (4) 여수 평화의 소녀상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고자 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저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는 내 나름의 재능 기부 방식이다. 단,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더보기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 (3) 강릉 평화의 소녀상 #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 (3) 강릉 평화의 소녀상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고자 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저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는 내 나름의 재능 기부 방식이다. 단,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더보기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 (2) 남해 평화의 소녀상 #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 (2) 남해 평화의 소녀상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고자 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저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는 내 나름의 재능 기부 방식이다. 단,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더보기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1) 부산 평화의 소녀상 –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인권과 명예회복의 상징 #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1) 부산 평화의 소녀상 -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인권과 명예회복의 상징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고자 한다.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저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는 내 나름의 재능 기부 방식이다. 내가 소녀상을 찾아간 이유 20.. 더보기
3·1운동의 상징, 유관순과 그녀의 유적지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과 그녀의 유적지 (일제의 고문과 구타로 콧망울이 주저앉고 상처가 남아 얼굴이 부은 옥중 사진) 3·1 운동의 상징 아이들이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3·1운동이 시작될 때 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민족 대표 33인 중 아는 사람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 유관순, 그 다음이 김구이다. 대중이 생각하는 독립운동의 상징인 인물들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3월 1일 당일, 대중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만세 운동을 주도해야 할 33인의 민족 대표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음식점 태화관에서 자기들끼리 선언문을 낭독하고 얼마 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운동을 이끌어야 할 33인은 시작도 하기 전에 체포되어 감옥에 간 것이다. .. 더보기
다산 정약용과 강진, 해남 # 다산 정약용과 강진, 해남 다산초당 “정약용만은 죽여야 한다.” 정약용의 형 정약현의 사위이자 천주교도였던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중국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는 청원서가 발각되면서 대대적인 숙청의 바람이 불었다. 이 황사영 백서사건 당시 조정의 노론 벽파 강경파들은 황사영 백서의 배후로 정약용 형제를 지목하여 이미 귀양 가 있던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을 잡아 올렸다. 그러나 애초에 모함이었으니 증거가 없었다. 결국 정약용 형제는 다시 귀양을 가게 됐는데, 형 약전은 흑산도로, 동생 약용은 강진으로 갔다. 강진과 다산 정약용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청자 생산지로서 명성을 쌓은 고장, 농산물과 해산물이 풍부하여 생산이 풍족하고 인심이 넉넉한 고장, 정약용은 이 강진 땅에서 외갓집 인척.. 더보기
이순신 명량대첩의 현장 – 울돌목, 그 바다를 가다 # 이순신 명량대첩의 현장 – 울돌목, 그 바다를 가다 녹진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울돌목, 빠른 물살이 여기서도 보인다 불패의 명장으로 우리 역사와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순신, 지금껏 그의 이름과 승전을 내건 영화나 드라마도 열손가락 이상 꼽을 정도로 끊임없이 소재가 되고 있는 인물이다. 우월한 선진적 전술, 철저한 준비, 강력한 리더십, 어느 하나 빠짐없는 신화를 기록한 이 인물의 수많은 승전 중에서도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마저 반전시킨 최고의 극적인 드라마가 해남과 진도 사이의 바다, 울돌목, 명량에서 쓰였다. 임진왜란 당시 막강한 일본 수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지만,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백의종군해야 했던 이순신, 그 후 칠천량해전에서 130척이 넘는 조선 수군이 왜군에 전.. 더보기
김윤후와 충주산성 - 몽골의 침략을 이겨낸 리더십과 저항의식 # 김윤후와 충주산성 - 몽골의 침략을 이겨낸 리더십과 저항의식 충주산성 동문 일대 1253년 12월, 몽골의 5차 침입 당시 충주시 남쪽 충주산성은 예구가 이끄는 몽골군 주력과 대치하며 10월부터 두 달 이상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이제 식량은 거의 떨어졌고, 성 안의 주민들과 방어병들은 지쳤다. 이미 충주까지 내려오는 동안 남자 10세 이상은 모두 죽이고 여자는 포로로 잡아가는 대량 학살을 몇 번 씩 자행한 몽골군은 살기에 넘쳐 있었다. 이때 방호별감 김윤후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외쳤다. “여러분! 이 성을 끝까지 지켜내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여러분 모두에게 관직을 내리겠습니다. 모두 믿으시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그리고는 주민들 앞에서 관노비의 명부를 불태우고 몽골군에게 빼앗은 소와 말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