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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답사 (6) 군산 평화의 소녀상

 

 

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지금도 세워지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답사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필자만의 평화적인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이 사회의 여러 노력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지역의 역사성과 소녀상 건립이 갖는 의미, 소녀상의 모습과 상징성 등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한 평화의 소녀상 답사를 넘는 지역 답사의 의미도 갖게 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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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동종은 명치유신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포교라는 미명하에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 (중략)

특히, 한반도에서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라는 폭거를 범했으며, 조선을 종속시키려 했고, 결국 한국을 강점함으로써 하나의 국가와 민족을 말살해 버렸는데, 우리 종문은 그 첨병이 되어 한민족의 일본 동화를 획책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중략) 황민화 정책은 한민족의 국가와 언어를 빼앗았으며 창씨개명이라 칭하여 민족문화에 기반을 둔 개인의 이름까지도 빼앗아버렸다. 조동종을 비롯한 일본의 종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그러한 만행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략) 불법을 국가 정책이라는 세속적 법률에 예속시키고, 나아가 타민족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침탈하는 두 가지 잘못을 함께 범한 것이다.

 

우리는 맹세한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침범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든 민족이든 마찬가지이다. (중략)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맹세한다.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그리고 과거 일본의 억압 때문에 고통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면서 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이다.

19921120

 

동국사의 개산 기념일에 일본 조동종에서 발표된 참사문(발췌)을 조각한 비석을 동국사의 정원에 세우고 제막식을 봉행한다.

불기 2556(서기 2012) 928

일본의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건립

 

 

전라북도 군산시 동국사 평화의 소녀상 뒤, 일본 불교 조동종 종파의 참사비에 새겨진 글이다.

 

군산 평화의 소녀상, 뒤의 비석이 조동종 참사비이다

 

가슴을 때리는 이 참회의 글은 진정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절절이 깨닫게 한다. 이것이 진정한 사과요 참회이다. 어느 한국인이 이 글을 보며 거짓말 마라고 하겠는가.

 

다만, 불행히도 이렇게 참회하고 사과하는 사람들이 일본에서 소수라는 점이다. 일본인의 다수는 여전히 한국인들의 감정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한국인의 피해의식내지는 떼쓰기정도로 가볍게 치부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베 내각과 같은 극우 세력이 정권을 오래도록 담당하는 것은 다수 일본인들의 의식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다.

 

그러니 반대로 조동종과 같은 종파의 참회는 무척 소중하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일본인들이 많아지도록 그들과의 소통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동국사 전경

 

 

사찰 안에 당당히 서 있는 소녀상

 

참사비가 있는 군산은 금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은 고장이다 보니 과거부터 교통과 군사의 요지였던 곳이다. 고려시대부터 전라도 지방의 조세미를 보내는 진성창이라는 조창이 있었던 곳이며, 고려 말 전국의 바다를 약탈한 왜구를 상대로 최무선의 화포가 맹위를 떨친 진포대첩의 현장이 이곳 앞바다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때는 호남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이라 자부하는 고장이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거점 항구로 이용되면서 규모가 커진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특히, 항구에서 동국사에 이르는 옛 도심에는 일본식 건축물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

군산시에서는 지난 10여 년 간 이 도심을 <시간여행의 길>이라 이름 붙이고 근대의 아픈 역사를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현장으로 조성해 나가고 있다.

 

 

군산 평화의 소녀상은 이런 구도심의 끝자락쯤에 해당하는 월명산 아래, 일제 강점기 조동종 사찰이었던 동국사 서쪽, 조동종 참사비 앞에 우뚝 서 있다.

 

소녀상은 2015812,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사찰 경내에 세워졌는데, 군산 평화의 소녀상 건립 위원회가 시민들을 대상으로 모금하였고, 고광국 작가가 제작하였다.

모금에는 일제 강점기 자국의 과거사를 반성하는 일본의 시민단체 동지회가 참여하였고, 제막식 날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가 참여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제작자는 강제로 끌려가 고통 받는 삶 속에서 갈 수 없는 고향을 향해 해안가에 서서 처연하고 간절하게 바라보며 상념하는 소녀상으로 표현하였다고 말한다.

 

 

소녀상은 키 158cm의 청동 조각상이며, 한복 차림에 맨발로 서 있는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다. 겨울이라 추워 보였는지 시민들이 손에는 장갑을 끼우고, 몸에는 목도리에 망토까지 씌워 놓았다.

 

얼굴과 표정을 보면 한편으로는 처연하지만 한편으로는 당당하다. 다른 소녀상에서 보는 앳된 얼굴이나 비장감이 감도는 얼굴이 아니라 목을 들고 먼 곳을 바라보며 힘겨운 과거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듯한 양면의 얼굴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 일반적인 17세 소녀를 모델로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보면 소녀라기보다 20세를 갓 넘긴 성인 여성의 성숙함이 느껴진다.

 

 

동국사와 대나무숲이 가르쳐 주는 것

 

소녀상이 들어선 동국사는 1909년 일본 승려 우치다가 만든 사찰로, 1913년에 현재 자리로 이전한 조동종 계열의 사찰이었는데, 해방 후 정부에 이관되었다가 1970년 대한불교 조계종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사찰은 군산에서 태어난 고은 시인이 출가한 사찰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처마에 장식이나 단청이 없고, 높고 가파른 경사면을 보이는 지붕, 대웅전과 요사채가 복도로 연결된 구조, 일본 에도 시대의 건축 양식이라 한다. 요모조모 따지지 않아도 한눈에 일본식 사찰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절 경내의 <다온>이라는 찻집은 조용하고 깔끔하다. 통유리 창밖으로 펼쳐지는 사찰 측면과 뒤편의 왕대숲이 운치가 있다.

찻집을 지키는 분께 손님들이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물어 보았다.

 

참사문이나 소녀상 이야기도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절 뒤의 대나무숲 이야기를 많이 해요. 일제 때 사찰에서 조성한 것이라 하는데요,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야무지게 잘 만들어놨어요. 이 땅을 영원히 지배한다고 생각한 듯해요.”

 

 

그렇다. 그들은 우리 땅을 완전히 일본 땅이라 간주하고 영원히 이 땅을 지배하고자 장기적인 안목으로 하나하나 다양한 사업을 해 나갔다.

잘 조성해놓은 왕대숲을 올려다보며, 그리고 바람에 사각거리는 그 숲 속을 걸어보며 그들의 행태를 생각해 본다. 집요하고 끈질기며 상대의 약점을 철저하게 파고드는, 우리가 보기에는 비열해보이기까지 한 그들을 상대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동국사 뒤 왕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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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1227, 강경화 외교부 장관 직속 TF 팀이 한일위안부 합의에 비공개 이면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고, 다음날 문재인 대통령은 위안부 협상은 절차적으로나 내용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됐다라고 하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국가와 국가 간의 조약과 협정, 합의는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대단히 신중하게 한 구절 한 구절 손익을 따져가면서 검토하고 체결해야 하는 법. 국익이 충돌하는 외교의 전쟁터에서는 한 번의 잘못된 공식 협정이 미래에 끼치는 해악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과 공식적으로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라는 강화도조약(1876)을 보라. 치외법권(영사재판권) 조항 다 알지 않는가. 일본인이 한국인을 상대로 한국에서 행한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일본에 넘겨준 조항.

 

19년 뒤 일본 정부가 배후 조종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범인들이 어떻게 되었나. 모두 안전하게 일본으로 호송되어 일본에서 재판을 받고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 석방되지 않았나. 그들 중 일부는 일본 정계의 거물과 거물급 언론인이 되어 제국주의 침략에 앞장섰다.

 

한 나라의 왕비가 죽음을 당했는데, 그 범인들에 대한 재판권도 없는 나라.

이런 역사의 치욕을 다시 반복하고 싶은가.

역사를 시험공부용으로만 배웠나.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라는 구절이 들어간 황당한 한일위안부 합의. 일본 측에 철저히 유리한 합의문이라는 증거다.

그러니 어차피 아베로 대표되는 저 일본 정부가 재협상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그들에게는 불가역적 해결이 된 합의인데 재협상 하겠나. 따라서 이 합의는 부작용이 더 나타나기 전에 하루 빨리 폐기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찰 한 켠에 참사비를 세운 일본의 조동종과, 지금 일본의 우익 세력과 그들을 등에 업은 아베 내각, 그들의 양면이 씁쓸하게 겹쳐 보인다...

 

동국사 대웅전 내부  

 

 

답사 정보

동국사 주소: 전라북도 군산시 동국사길 16(금광동 135-1)

동국사 정보: 063-462-5366, www.dongguksa.or.kr

 

대중교통으로는 군산역과 군산고속버스터미널에서 12, 54, 66번 등 시내버스를 타고 명산사거리 하차, 2분 거리에 위치. 혹은 1,2번 시내버스를 이용해 근대역사박물관 앞에 내린 후 시간여행의 길을 따라 천천히 답사하며 올라가는 것도 한 방법.

 

군산 내항 항구에서부터 동국사에 이르는 골목은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시간여행의 길>이다. 근대역사박물관, 옛 군산세관, 근대미술관(구 일본 제18은행 군산 지점),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신흥동 일본식 가옥(히로쓰가옥), 고우당 등을 찬찬히 둘러보며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은 초원사진관도 그대로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제과점인 이성당의 단팥빵과 야채빵, 곳곳의 콩나물국밥집과 한정식 집들은 허기를 채우기에 충분하며, 여러 게스트하우스와 숙박시설들도 곳곳에 들어서 있다.

 

 

#  이 글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올리고 오마이뉴스의 메인 기사가 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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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시 금광동 135-1 |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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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5) 안동 평화의 소녀상

 

 

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고자 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저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는 내 나름의 재능 기부 방식이다.

 

,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지역의 역사성과 소녀상 건립이 갖는 의미, 소녀상의 모습과 상징성 등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경북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리는 안동시.

지난 20178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대통령이 직접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룡 집안과 임청각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일시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그 고장의 독립운동 기념관이 있는 곳, 대궐 같은 99간 임청각에서 편안히 사는 삶을 팽개치고 재산을 모두 처분한 다음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그 집안에서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석주 이상룡으로 대표되는 고성 이씨 집안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돋보이는 고장,

 

독립운동가 이상룡을 배출한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의 군자정

 

 

일제 강점기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고장,

장엄한 목소리로 광야’, ‘청포도등의 시를 써 일제에 직접 저항한 이육사의 고장,

가장 보수적인 고장이지만 국가의 위기에 처하여 혁신 유림이라 할 공화주의자, 민족주의자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도 다수 배출한, 좌우익을 망라한 인재의 고장이 바로 안동이다.

-그러고 보면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등 조선시대에도 숱한 인재를 배출했다-

 

안동 출신의 저항 시인 이육사

 

낙동강 지류의 두 줄기가 만나 비로소 제대로 강이 되어 동네 앞을 흐르던 면면한 기상이 안동에 서려 있다.

퇴계 이황의 보수 유교, 이기일원론으로 근본을 따지는 철저한 유교 이념의 전통이 살아 있어서일까. 과거에는 길거리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면 어르신들이 달려가 뺨을 쳤다는(안동 출신 선배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 지독할 정도로 보수적인 고장이지만, 필요하면 보수를 버리고 혁신과 개혁의 길을 갔던 그 담대함과 용기가 서려 있다.

 

영호루에서 낙동강을 건너다본 안동 시내

 

말로만 떠들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뒤로 발을 빼는 비겁한 사람과 집단들이 많은 시대일수록 그들의 용기와 기개에는 감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고장이며 할 말도 많은 고장이다.

 

이 고장에 올해 2017815, 경북에서는 네 번째로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섰다.

 

웅부공원에 복원된 안동 대도호부 관아 건물 영가헌

 

장소는 웅부공원.

조선시대 안동대도호부가 자리했던 곳으로, 2006년 안동시가 영가헌과 대동루 등을 복원하여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안동미술협회 회원들이 안동 시민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였고, 목표액인 6천만원에 조금 모자랐지만, 미술협회 회원들의 재능 기부 형식으로 비용을 절감하여 그들에 의해 만들고 세워졌다.

 

 

 

권택기 추진위(18대 국회의원) 공동 대표의 말,

전국에서 독립운동 유공자, 지정 순국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에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매우 뜻 깊다. ... 오늘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 올바른 역사관을 잡아주게 되길 바란다. 이를 통해 역사를 왜곡하고 반성이 없는 일본의 그릇된 행태를 알 수 있게 하여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녀상 건립의 의의이다.

 

안동은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증언 채록집 내가 어떻게 말을 해요. 어무이 가슴에 못 박을라꼬를 낸 () 김옥선 할머니, 11세 어린 나이에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김외한 할머니 등이 안동 태생이다.

 

이들의 증언을 없는 듯 싹 무시하며, 본인들의 자율적 의사에 의해 위안소에 갔고, 이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며 위안소를 운영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본 정부, 일본 우익의 태도이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반적인 평화의 소녀상과 다른 모습이다.

청동(브론즈)으로 제작된 소녀상은 155cm 정도의 키에 52kg 정도의 체중을 가진 당시 평균치인 소녀의 모습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올 때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그래서 다른 소녀상과 달리 손에 작은 보자기를 들고 있다.

 

 

그녀가 앉은 황금색 바위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언덕 위에서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왼손은 다시는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앞으로 내딛은 왼발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를, 뒷꿈치를 든 오른발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다급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뒤편 바닥의 그림자는 시대와 사회와의 단절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며, 소녀와 고향을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도 한다.

 

 

소녀상 바로 옆에 서 있는 대동루 

 

가장 일반적인 소녀상과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안동 평화의 소녀상은 좀 더 풍부한 상징성과 의미를 담고 웅부공원 앞 길가를 바라보고 있다.

 

무엇보다 안동 출신 위안부 할머니들이 저세상에서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거나 평화롭게 여생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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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동부동 65-2 | 안동 평화의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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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귀여운걸 2017.10.05 16:45 신고

    어머~ 올해 네번째로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섰군요..
    올바른 역사관을 잡아주게 되기를 바래봅니다~

  2. 空空(공공) 2017.10.06 08:39 신고

    안동에도 생겼군요
    대구 국채보상운동공원에도 있습니다
    안동 답사때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자유여행인 2017.10.06 09:20 신고

      ^^ ~ 대구에는 두 개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두번째 것은 시민단체측과 중구청 측이 설치 장소를 놓고 대립하다가 결국 2.28공원에 설치하는 걸로 타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대구 경북 지역이 땅덩어리는 넓지만, 면적에 비해 소녀상이 설치된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상당히 적다는 사실입니다....

  3. 안동평화의소녀상 2017.10.22 18:31

    안동평화의소녀상 집행위입니다~
    안동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무한한 관심에 감사 인사드립니다.
    글을 읽다 보니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어서 댓글 달아요~
    안동 평화의소녀상은 안동평화의소녀상집행위원회로 자진 등록한 안동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모금활동을 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안동미술협회에는 안동평화의소녀상 집행위원회에서 직접 의뢰를 하여 소녀상의 모습을 함께 의논하여 만들고, 작업을 진행한 부분이랍니다^^
    나중에 안동에 또 들릴 일 있으시면 꼭 한번 더 들려주세요, 지자체에 조례를 통과하여 cctv도 최근 설치하였고,
    현재 동판작업을 진행중이라 곧 동판도 세워질 예정이에요^^

    • 자유여행인 2017.10.22 18:47 신고

      ^^ ~ 네, 감사합니다.
      저는 언론과 방송에 보도된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올려서 오류가 좀 있었네요.
      제가 사는 곳이 안동에서 그리 멀지는 않는 곳이니 안동에는 자주 가는 편입니다. ~~
      동판이 세워졌다는 소식이 들리면 조용히 방문하겠습니다. ^^

 

#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4) 여수 평화의 소녀상

 

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고자 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저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는 내 나름의 재능 기부 방식이다.

 

,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지역의 역사성과 소녀상 건립이 갖는 의미, 소녀상의 모습과 상징성 등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오랜 침묵의 뼈로, 푸른 어둠의 가슴앓이로, 살아서도 죽고, 죽어서도 살아, 여기 찢긴 바람의 지문으로 앉다.

피 젖은 귀향, 열다섯 단발머리 소녀의 눈빛을 보라. 기억과 망각의 이 땅 평화와 인권을 위해 여기 한 마리 나비되어 앉다. 2017. 3.1 ”

 

여수 평화의 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가 설립한 소녀상 기념비에 쓰인 내용이다.

다른 지역의 소녀상에 붙인 글과 다르게 비장하고 감성적인 표현으로 장중하게 서술하고 있는 데다 읽는 사이에 운율까지 느껴지니, 마치 여수 지역의 어느 시인이 쓴 듯한 생각이 든다.

 

 

 

 

전남 여수.

한려수도, 혹은 한려해상의 한쪽 끝, 사계절 잔잔하고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항구 풍경이 멋진 곳, 남해안에서 통영과 함께 미항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도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이 있던 곳, 그리고 삼도수군 통제영이 설치되어 이순신이 수군을 끌고 활약하던 본거지. 그래서 이순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도시. 선소 유적지, 진남관, 충민사, 타루비, 통제 이공수군대첩비 등 숱한 이순신 관련 유적들이 있는 도시.

 

 

이순신광장 일부

 

201731일 삼일절, 이 여수 바닷가 이순신 광장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여수 평화의 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가 추진하고, 9개월 간 시민 1만여 명이 참여, 9,800만원의 성금을 모아 세웠다.

 

주철현 여수 시장은 이곳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평화의 소녀상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시대의 아픔을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평화의 소녀상 제막을 계기로 화합과 참여, 평화 정신을 가지고 아픈 역사를 대승적으로 치유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이순신광장에는 바다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이 광장 한 켠에 자리한 평화의 소녀상은 바다가 아닌, 광장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정면으로 광장의 거북선 모형과 보행 육교가 보인다.

 

 

 

소녀상 자체는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소녀상과 같은 모습이다. 1930~40년대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어깨 위에는 위안부 여성들의 영혼을 상징하는 새가 앉아 있고, 살짝 들린 맨발은 바닥에 붙어 있다. 꼭 쥔 두 손, 바닥의 할머니 그림자, 옆자리의 빈 의자, 모두 충실하게 재현되어 있다.

그녀의 옆에는 몇 개의 시비가 돌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광장에 있어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다가 발견하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광장의 한쪽 구석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이라 지역의 명소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순신광장 앞 바다 옆에 세워진 거북선 모형

 

 

이순신광장은 여수해양공원(종포해양공원)으로 이어지고, 하멜 등대를 지나 거북선대교까지 해안길을 따라 걸어갈 수 있다. 이쯤 오면 머리 위로는 해상 케이블카가 바다를 건넌다.

이 일대의 풍경이 낭만적이고, 야경이 좋은 곳이라 여수에 하룻밤 머물면서 찬찬히 시내를 즐길 만하다.

 

 

여수 바다 야경  

 

 

이 여수 바닷가 이순신광장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 시민들 뿐만 아니라 여수를 찾는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잠시라도 참배하고 갈 수 있는 명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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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시 중앙동 383 여수 이순신광장 앞 | 평화의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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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3) 강릉 평화의 소녀상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고자 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저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는 내 나름의 재능 기부 방식이다.

 

,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지역의 역사성과 소녀상 건립이 갖는 의미, 소녀상의 모습과 상징성 등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강원도 백두대간 동쪽 지역을 흔히 관동지방이라 부른다. 대관령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그 대관령을 넘어 만나는 고장이 강릉이니, 강릉은 관동지방의 관문이자 대표적인 고장이라 할 만하다.

 

이 강릉을 대표하는 여행지이자 상징이라 할 곳이 경포호이고, 이 경포호 입구에 있는 3.1운동 기념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경포 생태습지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며, 요즘 이름을 알리고 있는 가시연습지로 들어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강릉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기념하는 공원에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이 소녀상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강릉지역 보훈 단체에서 최명희 시장에게 건의를 하면서 201585에 세워졌다. 강원도에서는 가장 먼저 세워진 소녀상이다.

 

 

이 소녀상은 위치가 참 좋다.

소녀상 등 뒤에서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멀리 경포호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며, 정면에서 태극기가 휘날린다. 오른쪽으로는 3.1운동 기념탑이 서 있다.

나는 한동안 이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를 추모하였다.

 

 

소녀상 옆 바닥에 누워 소녀상 건립을 기념한 평화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피맺힌 고통을 겪은 소녀들의 아픈 역사를 기억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는 이 땅에 전쟁과 폭력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행위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평화와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을 꿈꾸는 강릉 시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웁니다.”

 

 

평화의 소녀상은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소녀상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

1930~1940년대 평범한 소녀들의 외모를 가진 단발머리 형상으로, 두 손을 꼭 쥔 채 의자 위에 앉아 있다.

 

소녀상 오른편에는 이 소녀상에 담긴 상징들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내용에 보면 어깨 위의 새는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매개체, 발꿈치가 들린 맨발은 위안부의 상처와 사회적 편견으로 온전히 이 땅에 발 딛지 못한 삶, 빈 의자는 먼저 떠난 할머님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향한 참여, 할머니의 그림자는 소녀가 할머니가 된 시간의 그림자, 잊히지 않는 역사의 증거, 나비는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영혼이자 진정한 해방을 향한 희망을 상징한다고 쓰여 있다.

 

 

지역 신문(강원도민일보)에 의하면 강릉 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겨울에는 핫팩, 목도리, 털모자 등이 씌워지기도 했다고 한다. 바로 앞에서 방문객들에게 습지 안내를 맡고 있는 경포 습지 해설사들은 작년(2016)에 가을 식물로 만든 꽃바구니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시민들이 수시로 찾아 관심을 갖고 아끼는 명소가 되기를 바란다.

 

 

 

사실 생태습지와 가시연습지를 보러오는 여행객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이 평화의 소녀상에 멈추어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전에 정보가 없어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생태습지의 연꽃

 

5~9월경이면 습지와 연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때이므로 이때쯤 들러서 보고 가거나, 경포호에 벚꽃이 피는 4월 초~410일경에 들러보면 여행길의 즐거움과 함께 할 수 있다.

 

 

가시연습지의 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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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강릉시 저동 645 경포 3.1운동기념공원 내 | 평화의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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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2) 남해 평화의 소녀상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고자 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저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는 내 나름의 재능 기부 방식이다.

 

,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지역의 역사성과 소녀상 건립이 갖는 의미, 소녀상의 모습과 상징성 등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남해 평화의 소녀상 

 

지난 몇 년 간 전국 각지에는 뜻 있는 지역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60여개 이상의 소녀상이 세워졌고, 아직도 세워지고 있거나 계획하고 있는 곳들도 꽤 많다. 해외에도 우리 교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하나하나 세워지고 있는 추세이다.

 

위안부 소녀상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말자.

일본의 종군 위안부로 강제 성노예가 되었다는 좁은 의미를 뛰어넘어, 세상의 모든 조직과 권력의 힘으로 부당하게 전개되는 여성 인권의 유린, 특히 전쟁 중에 이루어지는 여성 인권의 유린을 비판하고, 이러한 인권 유린과 억압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 라는 의미에서 좀 더 보편적인 의미를 담은 평화의 소녀상이라 불러야 한다.

, 보편적 인권을 상징하는 소녀상인 것이다.

 

본래 어떤 의미에서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남해군의 대표적 상징 중 하나인 금산 

 

 

경남 남해군은 하나의 섬이다. 남해도라는 섬 하나가 통째로 남해군이 된다.

남해군 사람들은 자신들의 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며 반일 감정도 다른 지역 못지않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의 약탈과 군사적 공격에 자주 노출된 지역이었고, 그만큼 일본과의 전쟁도 많았던 지역이다.

 

고려 말 정지 장군이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격파하자, 지역 주민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석탑을 하나 세웠는데, 이것이 지금도 고현에 남아 있는 정지탑이다.

임진왜란 때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도 바로 이 관음포 앞바다의 전투였다. 그 유적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러니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다.

 

2015814일 광복절 전날, 이 남해군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남해군에는 이 곳 출신이자 위안부 피해자인 박숙이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193816살 어린 나이에 바닷가에 조개를 캐러 가다가 외사촌과 함께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할머니. 일본 나고야를 거쳐 중국 만주로 끌려가 위안부로 7년 동안 갖은 고통을 겪었다.

해방 이후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다가 7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2016126일 향년 93세로 별세하셨다.

 

20153월 남해군 박영일 군수가 할머니를 문병한 뒤, 할머니에게 소녀상 건립을 약속하였고, 바로 그 해 814일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위치는 남해읍 여성인력개발센터 앞 소공원. 소공원의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을 따 숙이공원으로 불린다.

 

 

숙이공원과 평화의 소녀상 

 

숙이공원에 세워진 소녀상은 다른 곳의 소녀상과 다른 모습이다.

대부분의 소녀상은 의자에 앉아 있으나, 이 소녀상은 꼿꼿이 서 있다.

 

 

소녀상은 그대로 할머니의 상징이다. 조개를 캐다가 끌려간 그녀의 형상화이다.

옆 의자에는 강제로 끌려간 현장의 호미와 소쿠리가 놓여 있는데,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던 어린 소녀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간 역사를 알리기 위해 형상화하였다.

맨발과 뜯긴 머리카락은 할머니들의 한을 표현하며, 두 손에 들고 있는 동백꽃은 의지와 생명력으로 험한 풍파를 이겨낸 할머니들의 인생을 의미한다.

 

 

 

 

의자 뒤에는 다른 소녀상과 마찬가지로 할머니의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 안에 나비가 있다. 나비는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나비로라도 환생해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소녀상 옆에는 숙이나무로 이름 붙은 동백나무가 있다.

그 옆 나무판에는

강인한 의지로 험난한 풍파를 이겨내신 박숙이 할머니가 평소 좋아하는 동백나무는 할머니의 나이와 동일하며, 생명과 평화를 지켜내시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라고 쓰여 있다.

소녀상이 박숙이할머니를 상징하는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소녀상과 모습도 다르고 의미도 남다르다. 내가 소녀상 찾기의 첫 번째 장소로 정한 이유이다.

해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오후에 소녀상을 찾았다. 물어물어 찾아가니 읍내 사람들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안타깝다.

 

여성인력개발센터 앞에 있는 소공원을 간신히 찾아 소녀상 앞에서 묵념을 하였다.

후손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그 고통을 상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부당한 권력에 희생당하신 할머니, 평생 울분과 한을 품고 살아가신 할머니, 저 세상에서라도 편히 잠드소서.

 

남해 여성인력개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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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TV 나 신문 기사를 통해 한일 위안부 합의나 일본 정부의 태도, 부산 평화의 소녀상 건립 위치 등에 대해 감정적으로 분노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스스로 국제인임을 내세우며 똑똑함을 자랑하는 어떤 사람이 부산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 영사관 담장 옆에 세워진 것은 반대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우리는 왜 항상 자제해야 하고 자중해야 하는가. 일본 정부의 부당한 간섭과 파렴치한 행위들에 대해 외교적 입장이나 객관적 대응 등을 내세워 점잖게 상대해야 하나.

정당한 분노라면 분노를 표현해야 한다. 상대방을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군사적으로 공격하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부산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 영사관 앞에 세워졌을 때, 외교적 결례이니 국제적 예양이니 하면서 이를 부적절하다고 주장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저들이 예의를 지키지 않고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는데, 우리는 예양을 따지며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가. (실제로 예양에 어긋난 것도 아니다. 영사관 안에 세워진다면 어긋난 일이지만, 영사관 정문 앞도 아니고 담장 옆이라면 국제법상 문제될 것도 아니다)

 

일본을 앞세우고, 일본과 한국의 동맹으로 북한과 중국을 상대시키고자 위안부협상을 서둘러 체결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그대로 굴복한 박근혜 정부가 쫓기듯 체결한 위안부 합의는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더라도 폐기하는 것이 낫다. 일본 아베 내각은 절대로 재협상하지 않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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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군 남해읍 아산리 355-6 숙이공원(남해군 여성인력개발센터 앞) | 평화의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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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1) 부산 평화의 소녀상  -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인권과 명예회복의 상징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틈날 때마다 찾아다니고자 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반성하지도 않는 저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며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는 내 나름의 재능 기부 방식이다.

 


내가 소녀상을 찾아간 이유

 

  20172월 어느 날, 대한민국 외교부가 부산시와 부산시의회, 부산 동구청에 공문을 내려 보내 일본 영사관 담장 옆 평화의 소녀상 이전을 촉구했다는 기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산으로 향했다.

 

  외교부 대변인 왈, "어떤 압박이라든가 강요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부는 이러한 입장을 작년 말부터 수차 표명해 왔다", "좀 더 분명하게 관련 지자체에 (소녀상 이전에 대해 지혜를 모으자는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공문을 보낸 것"이라고 한다.


... 공무원을 비롯한 공직에 있어본 사람들은 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낸 공문의 내용이 비록 권유의 형식을 띠더라도 표현만 그럴 뿐, 사실상 명령이자 압박인 것을.

의례적인 수사 뒤에 숨은 속뜻을 알기 위해 상급 기관에 연락해서 확인도 한다는 것을.

 

  대한민국 외교부는 학습지도 요령 개정 초안 공개를 통해 독도 영유권 도발을 한 일본에 대한 외교적 대응보다 일본 외교관을 한국에 돌아오게 하기 위한 소녀상 이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나 보다. (하필 공문을 내려 보낸 날(214)이 일본이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 영유권 표기를 반드시 하라는 학습 지도 요령 초안을 공개한 날이라니!)

공문을 보낸 주체가 일본 정부라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 젠장.

 

그래서 부산에 갔다.

 

소녀상 옆 기부자 명단을 새긴 청동판 


평화의 소녀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부산 지하철 1호선 초량역 5번 출구 옆.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이 가장 먼저 들어와 전투를 벌이고 조선군을 전멸시킨 부산성, 바로 그 일대.

부산성을 지킨 정발장군이 부산성 군대와 주민들과 함께 죽음을 당한 그 일대. 그래서 정발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 그 옆


정발 장군의 동상 


  희한한 역사의 수레바퀴이다. 일본이 영사관을 세운 그 자리가 그런 의미가 있다는 걸 알고 세운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소녀상은 담장을 바라보며 의자에 차분하게 앉아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일부러 찾아 온 사람들이 하나둘 잠시 지켜보거나 사진을 찍고 간다. 도로를 지나가는 버스나 승용차 안 사람들도 흘끔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영사관을 지키는 전경들이 가끔씩 담장을 오가기도 한다.

 

  잠깐 차가 지나가지 않을 때 인도에서 도로로 나가 소녀상 뒤편에서 영사관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하게 정면으로 일본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아하, 소녀상이 이 지점에 설치된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일장기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상 


  소녀상 자체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한다.

하나하나 확인해보았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 조각이다. 1930~1940년대 당시 조선 소녀들의 일반적 외모인 단발머리를 하고 있으며, 의자 위에 손을 꼭 쥔 채 맨발로 앉아 있다.

  단발머리는 부모와 고향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발꿈치가 들린 맨발은 전쟁 후에도 정착하지 못한 피해자들의 방황을 상징한다. 맨발이 추워 보여 시민들이 발에 두터운 양말을 신겨주었다.

소녀의 왼쪽 어깨에는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과 현실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소녀상 뒤편 바닥에는 할머니 모습의 그림자를 별도로 새겼다. 조각상은 소녀상이되, 그림자는 할머니의 그림자이다. 이를 확인하는 순간 울컥 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른다. , 어찌 이런 의미 깊은 상징을 새겨 놓았을까.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눈물이 흐른다.


소녀상 뒤편 바닥에 새겨진 할머니의 그림자 

 

  소녀상 옆에 놓인 빈 의자는 세상을 떠났거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모든 피해자를 위한 자리이다. 빈 의자에는 관람객이 앉을 수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고 간다.

 

  평화의 소녀상은 서울의 주한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비롯하여 현재 전국에 60여개 가까이 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와 미시간 주, 캐나다의 토론토에도 하나씩 있다. 모습은 약간씩 다르지만,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 평화의 소녀상이다.

이 소녀상들은 위안부 소녀상이 아닌, ‘평화의 소녀상이다. 이는 단순한 위안부 문제가 아니라 전쟁 범죄를 죄악시하고 비인간적인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인류 보편적 인권의 문제임을 표현한 용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부산 평화의 소녀상은 시작부터 갖은 풍상을 겪은 소녀상이었다.

20161228일 이 소녀상이 처음 설치될 때, 부산 동구청 직원들, 경찰이 강제로 철거에 나서며 시민단체 측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소녀상이 강제 철거되었지만, 부산 시민들의 강력한 항의를 통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1231일 제막식을 가졌고,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녀상은 본래 맨발이지만, 추울까봐 털 양말을 신겨 놓았다. 



소녀상은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20151228일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일본 정부와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

  그 합의문 안의 한 구절을 들여다보면,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과 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 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 라는 기가 막힌 내용이 있다.

 

  부산 평화의 소녀상 철거는 이 관점의 연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부산 평화의 소녀상이 철거되면 같은 선상에서 서울의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도 철거 혹은 이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평화의 소녀상은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위안부들의 인간적 존엄이 짓밟히고 피해를 당한 사실보다 일본 영사관의 안전과 품위가 우선인가. 위안부로 끌려가 숱한 고초와 고통을 겪은 그들에 대한 인권과 명예 회복보다 외교 공관의 품격과 국제 예양이 더 중요한가.

 

  의도는 알겠으나 그 위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아. 위치야말로 핵심이다. 소녀상은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정식으로 지난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에 진정으로 사과하며 그들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항의의 표현물이며 일본 정부에 대한 압박의 표현이다. 소녀상이 무슨 기념물이나 관광의 대상도 아니고,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가장 좋은 위치가 부산 전체에서 이만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어디 전망 좋은 장산이나 황령산 꼭대기, 아니면 관광지인 해운대 동백섬이나 시민들의 휴식처인 어느 공원에 있어야 의미가 있을까.


  과거 제국주의 일본 정부의 인권 유린과 조직적인 성폭력, 그리고 현재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뻔뻔함에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분노라고 믿는다. 그래서 더더욱 일본 영사관 앞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국제 예양에 의거, “(외교 공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이) 외교 공관의 보호와 관련한 국제 예양 및 관행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대한민국 외교부가 했다는 자체에 참담함을 느낀다. 도대체 이게 대한민국외교부가 할 말인가.

 

굳게 쥔 소녀상의 주먹, 제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를... 


  내 생각에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것 자체가 잘못되었으므로, 일단 파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일 위안부 합의 자체가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배제한 채 이루어졌으므로 원천적으로 무효이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양해를 구하고 재협상에 나서거나 아예 합의 자체를 파기하고 더 이상 합의를 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현재 우익 성향이 강한 아베 내각과는 합의 자체를 한다는 것이 웃기는 상황이다. 그들은 골치 아픈 문제를 빨리 처리하기 위한 돈 문제로만 접근하지,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고 사죄하면서 한일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시키기 위한 의지나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기는커녕 치졸한 조직적인 전쟁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은폐하기만 한다. 위안부는 당사자들의 의사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 선조가 강제로 동원했을 리 없으니 구체적인 증거를 내놓으라는 식이다. 수많은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비인간적인 태도이다.

 

  이러한 일본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한 것이 올바른 일인가. 그리고 당사자들을 배제한 합의가 정당한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해자인 일본 정부의 태도이다. 가해자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피해자의 입장도 달라지는 법이다. 그들이 진즉에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배상하고 그들 스스로 이러한 조직적인 성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의지를 보였다면, 우리가 이렇게 분노하며 강경하게 나섰겠는가.

 

  이 문제는 국가 간의 문제를 넘어선,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이다. 여성의 인권이 국가와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에 의해 철저하게 억압되고 유린된 극단적인 사안이다. 전쟁 상황에서 약 20만 명의 조선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가 성 노동을 강요당한 사안이다. 더구나 전쟁이 끝나가자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사살당하기도 하였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숨어 살아야 했다. 따라서 철저한 배상과 명예회복이 필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합의로 끝낼 사안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소녀상 설치는 인권 유린과 전쟁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상징적인 항의의 표시이자 명예 회복을 위한 노력이다. 과거 일본의 전쟁 범죄를 복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정, 사과, 그리고 위안부의 명예회복을 위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노력의 하나이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할 수 있는 위안부 합의를 명분으로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 하여 주한 대사를 철수시킨 일본 정부의 태도는 후안무치를 넘어선 뻔뻔함의 극치이다.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알 만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합의를 이행하려는 노력을 형식적으로라도 보여주겠다며 소녀상 설치를 막고 공문을 내려 보내는 외교부의 행태는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하면 일본 정부가 고맙다고 생각할까.

  법원의 공개 명령에도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위안부 합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저리 행동하는 걸 보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주변의 숱한 빌딩숲과 담장이 무척이나 높아 그 안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주부산 일본 총영사관. 소녀상 뒤에서 올려다보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일장기.

울컥 하는 심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참 지지리도 못나고 아픈 우리의 역사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아울러 우리 역사 속 지도층이나 지배층이 해 왔던 숱한 못난 행태들도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학생 시절 똑똑하고 공부 잘 해서 지금 정부와 외교부의 상층부에 자리하고 있는 분들께 당부하고 싶다. 제발 그 머리를 대한민국의 자존과 국민들의 존엄을 위해 쓸 수는 없겠는가, 억울해하고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국민을 상대로 국제 예양이니 뭐니로 소녀상 이전이 마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설득하려 하지 말고, 저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상대로 스스로가 과거를 반성하고 사과하게 하여 진정한 문제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그래서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할 수는 없겠는가

당신들은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의 지도층 아닌가.

 

국가와 정부가 바로 서야 국민이 편안하고 피해를 겪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망각의 늪이 찾아오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는 법.

나는 소녀상 앞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지금 여기에 이토록 길~게 기록한다. 단 한사람이라도 내 글을 끝까지 읽고 각성해주고 기억해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리고 부산 평화의 소녀상을 한번쯤 찾아 봐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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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사진에 대해서만은 저작권을 포기합니다. 누구든 자유롭게 글과 사진을 퍼가셔도 됩니다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과 그녀의 유적지

 

 

(일제의 고문과 구타로 콧망울이 주저앉고 상처가 남아 얼굴이 부은  옥중 사진)

 

 

 

3·1 운동의 상징

 

  아이들이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3·1운동이 시작될 때 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민족 대표 33인 중 아는 사람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 유관순, 그 다음이 김구이다.

대중이 생각하는 독립운동의 상징인 인물들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31일 당일, 대중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만세 운동을 주도해야 할 33인의 민족 대표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음식점 태화관에서 자기들끼리 선언문을 낭독하고 얼마 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운동을 이끌어야 할 33인은 시작도 하기 전에 체포되어 감옥에 간 것이다. 그래서 3·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거국적인 만세운동이었지만, 명확한 구심점이 없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33인 중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들이 이승훈(기독교계), 한용운(불교계), 손병희(천도교계) 등인데, 이외의 인물들은 이름조차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인사들 중 이후에도 꾸준히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일제의 감시와 압박으로 더 이상 민족운동에 나서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수이고, 심지어는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친일파가 된 인물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들에게 3·1운동의 진정한 대표라는 이름을 붙여주기가 어렵다. 그래서 민족대표와는 전혀 상관없었던 유관순, 김구 등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다.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민족대표 33인과 달리, 이 땅의 수많은 이름 없는 시민, 학생, 농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제의 총칼에 맞서 자발적으로 만세 운동에 나섰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들이야말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인공들이다.

이런 수많은 용감한 희생자들 중 가장 앞자리에 있는 3·1운동의 상징이자 꽃, 바로 유관순이다.


 

그녀가 3·1운동의 상징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녀를 상징으로 만든 홍보 효과 때문도 아니다. 그녀는 온몸으로 민족의 독립을 주장했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 진정한 항일 열사였다.

우리는 그녀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가.

 

 

유관순 표준 영정

 

 

18세 때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91941,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 병천(아우내) 장터의 오전 9, 3,000여 명의 군중이 심각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매달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자주국임을 선포하노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를 읽는 동안 모두가 숨죽이고 이를 경청하였고, 선언서 낭독이 끝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는 순식간에 만세의 함성소리로 뒤덮였다.

 

  이때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대열 사이를 돌며 태극기를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여린 목소리로도 힘차게 외쳤던 소녀가 있었다.

여러분! 우리의 이번 거사는 우리 겨레의 얼을 확실히 펴기 위한 것입니다. 동포들이여! 나를 따라 일제 침략자를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냅시다!”

 

오늘날의 아우내(병천), 병천순대마을로 불리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유관순.

  4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시위를 계획, 주도한 장본인 중 한명이었고, 천안 일대와 청주, 진천 일대의 시위 군중과 상인들을 이끌며 끝까지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죽을 때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며 순국한 소녀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 18세였고, 옥중에서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나이 19세였다.

 

19세에 죽어 100년을 산 3 ․ 1 운동의 상징

  유관순은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 사이의 5남매 중 둘째딸이다. 어린 시절은 평범하게 보내다가 1916년 기독교 감리교 충청도 교구 본부의 미국인 여선교사의 주선으로 서울 이화학당(이화여중고의 전신)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3 1운동이 일어나자 그녀는 이 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31운동 당시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자 일제는 이들을 막기 위하여 임시 휴교령을 내려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이화학당도 휴교하자 유관순은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인근 교회와 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의 소식을 전하였고, 천안, 연기, 청주, 진천의 학교와 교회를 돌며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이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과 김구응 등과 만나 41일 병천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유관순 생가

 

  이렇게 일어난 41일의 만세시위는 정오를 넘기며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하여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둘러 선두에 있던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시위 군중이 흥분하여 헌병 파견소로 몰려가 항의하자, 오후 2시경에는 무장한 헌병 지원군이 도착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시위군중이 흩어지자 헌병들은 군중을 끝까지 추격하여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다. 이러한 일본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부모를 잃은 유관순은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일행 40여 명과 함께 헌병 파견소로 몰려가 헌병들에게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그녀는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7년 형을 선고받고 서울에 끌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유관순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옥중에서도 계속되어 어윤희, 이신애 등과 함께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특수 감방인 지하 굴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이를 안타까워한 주변 사람들이 그만하라고 말려도 그녀의 독립에 대한 외침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세의 어린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어린 나이에 선두에서 민족의 독립을 외치며 죽을 때까지 싸웠던 그녀는 비록 19년밖에 살지 못했지만, 그녀의 의기는 100년이 가까워진 지금까지도 수많은 후손들에게 감동을 준다.

31운동을 이야기할 때 누가 이런 그녀의 앞에 서겠는가.

 

  처음 31운동에 앞장섰던 민족 대표 33인은 어느 누구도 31운동 때문에 사망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만세를 외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옥살이 하고 조용히 나와 조용히 살다 간 사람들이 태반이다. (물론 예외도 몇 분 있다)   그래서 이들 대신 유관순이 상징이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3 1운동 이후 결국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굴복하여 치욕의 일생을 살았던 많은 지식인과 친일파들이 부끄러워할 이름이 된 것이다.

 

  31, 그녀로 대표되는 이 땅의 수많은 이름 없는 불꽃들을 추념하자.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있다.

 

생가 내 조형물

 

 

- 그녀의 유언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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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 

오늘날 유관순은 보수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녀가 기독교인이었던 데다 3.1운동이 보수 쪽에서 훨씬 더 중요시하는 운동이다 보니 그런 듯 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치와 사회세력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이분법이 정당하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하여간 일반적인 인식 상 '보수'로 불리거나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대개 3.1운동의 의미를 강조하고 유관순을 추앙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진보'는 3.1운동의 의미를 인정하지만, 그보다는 한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러한 관점들이 안타깝다. 그녀는 보수와 진보의 관점으로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당시에는 이념 대립도 본격화되지 않던 시기였다.  

그녀는 3.1운동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이 땅의 시민, 학생, 농민들의 특징을 한몸에 갖고 있던 인물이며, 3.1운동이 어떤 운동인지, 이에 대응하는 일제의 만행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이념의 잣대로 호불호가 갈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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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순의 유적지를 찾아서

 

 유관순 생가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1,,, 도로명 주소를 확인 못함)

병천면 소재지 남쪽 용두리 조용한 마을에 한적하게 들어선 생가가 복원되었다. 낮은 여산을 배후에 놓고 남향을 하여 따뜻한 햇볕을 잘 받는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의 생가이다.

유관순은 1902년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건물은 빈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1년 초가집 본채와 부속사(대지 714)로 복원하였다. 생가 안에 들어가면 3 1 운동 당시에 유관순과 동료들이 만세시위 운동을 계획하는 장면을 밀랍 인형으로 복원하여 실감나게 만들어놓았다.

 

 

생가와 매봉교회

 

생가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유관순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위치해 있다.

주차장 쪽에는 만세시위 장면을 그려놓은 간판이 있는데, 사람 얼굴에 구멍을 뚫어놓아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현장에 방문하면 생가와 교회를 둘러보고 가볍게 동네를 한 바퀴 걸어보아도 좋겠다.

생가는 봉화지와 함께 197210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을 추모하는 곳, 유관순 추모각&기념관

(주소: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38

문의: 사적관리소 관리팀 041-521-2821~2 )

 

유관순의 항일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알리기 위하여 병천면 맞은편 산자락에 건립하였다. 여기에는 유관순열사기념관과 추모각, 기념공원, 봉화탑 등을 조성하였다. 191941일 당시 시위군중들이 피 흘리며 헌병에 맞서 싸웠던 헌병 주재소가 있던 장소이다.

기념관에서는 유관순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재판기록문 등 관련 전시물, 아우내 만세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 재판 과정을 담은 매직 비전, 열사의 생애를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하는 등 열사의 출생에서 순국까지의 일대기를 전시물과 영상, 다양한 체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추모각은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48위 애국 선열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으로, 다녀가는 사람들이 추모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유관순열사 추모각 옆에는 생태 연못, 휴게 쉼터, 순국자들의 신상 기록이 적힌 야외조형가벽과 광장이 있다.

 

 

유관순의 고향에 세워진 민족의 기념관, 독립기념관

(주소: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95)

 

1987년 병천면 이웃 동네인 목천읍에 세워진 대형 시설이다. 입구의 겨레의 탑이 인상적이며, 우리나라의 건국에서부터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관련된 수많은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수집한 유물보다 역사상을 재현한 조각, 조형물과 시청각 자료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디지털 시대에 걸 맞는 형태의 기념관이라 할 수 있다. 전시관은 모두 1~7전시관까지 있으며,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건물을 따라 이동하면 역사의 흐름에 따라 관람할 수 있다.

이 기념관이 중점적으로 다룬 부분 중 하나인 일제 강점기 당시의 자료들을 보면서 어려운 시절 끝까지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고 일제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의 의기와 용기를 확인할 수 있다.

(: 041-560-0114, www.i815.or.kr)

 

 

 

* 병천의 맛집

 

아우내를 한자로 옮기면 병천이다. 아우내 장터가 있던 곳은 지금 병천순대집들로 가득하다.

 

충남집(순대국밥, 041-564-1079)

부드러운 맛의 순대국밥으로 병천 순대마을에서 평이 가장 좋은 집 중 하나.

 

박순자아우내순대(순대국밥, 041-564-1242)

30년 전통임을 내세우는 원조집 중 하나로, 고소하고 담백한 순대가 좋다.

 

청화집(순대국밥, 041-564-1558)

 

 

충남집 순대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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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글과 사진은 여행작가로서 저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함부로 퍼가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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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38-1 | 유관순열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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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 정약용과 강진, 해남  



다산초당

정약용만은 죽여야 한다.”

정약용의 형 정약현의 사위이자 천주교도였던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중국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는 청원서가 발각되면서 대대적인 숙청의 바람이 불었다

황사영 백서사건 당시 조정의 노론 벽파 강경파들은 황사영 백서의 배후로 정약용 형제를 지목하여 이미 귀양 가 있던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을 잡아 올렸다. 그러나 애초에 모함이었으니 증거가 없었다


  결국 정약용 형제는 다시 귀양을 가게 됐는데, 형 약전은 흑산도로, 동생 약용은 강진으로 갔다. 강진과 다산 정약용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청자 생산지로서 명성을 쌓은 고장, 농산물과 해산물이 풍부하여 생산이 풍족하고 인심이 넉넉한 고장, 정약용은 이 강진 땅에서 외갓집 인척인 귤동마을 해남 윤씨 집안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다산초당에서 역사적인 저술들을 남기게 된다.


최근에 복원된 정약용의 임시 거처 사의재 


  하지만 처음 강진에 도착한 정약용은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임시로 동문 매반가의 주막집에서 그나마 주막집 주모의 배려로 작은 방을 얻어 쓰게 되었다. 최근에 강진 읍내에 복원된 사의재(四宜齋)가 그곳이다. 잘 복원되어 있어 들러볼 만하다. 이 사의재에서 주막집의 주모와 그 딸의 보살핌으로 마음의 안정은 찾았지만, 주변 환경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던 듯하다.

 

모기 벼룩 마음 놓고 덤벼드니 / 여름밤은 괴롭고 길기만 하다 / 밤 깊으면 번번이 발광하여 / 옷을 벗고 우물로 가 목욕을 하면 / 바람은 시원하게 내 얼굴에 불어오지만 / 숲이 울을 막아 서운하구나. / 

(1805년 제자 황상에게 보낸 시)


  중앙에서 한때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던 그가 정치적 반대파에게 숙청당하여 -그나마 목숨을 건져- 낯선 땅에 귀양 왔지만, 단순히 모기와 벼룩 때문만은 아니고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한 울분이 차고 넘쳤을 것이다. 잠 못 이루고 한밤중에 방에서 나와 우물물에 목욕까지 하는 정약용. 그의 복잡한 감정과 때때로 업습했을 괴로움, 절망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시작된 강진 생활, 동문 매반가 사의재 4, 보은산방 2, 제자 이학래 집에서 2, 모두 8년을 지낸 후 비로소 정착한 다산초당은 이후 10여 년 동안 다산이 학문에 열중하며 수많은 저서를 생산하는 산실이 되었다


정약용이 새겼다는 정석과 정석바위 


  다산은 이곳에 정착한 후 초당 옆 연못을 넓히고 주변에 여러 나무들을 심었으며, 정석(丁石) 두 글자를 바위에 새기고 장서 2천여 권과 자신의 방인 동암을 지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유명한 목민심서,경세유표600여 권을 헤아리는 작품들이 그의 개혁안과 함께 이곳에서 탄생한 것이다.................. 


  유배 생활은 그에게 개인적 불행이었지만, 이 유배 생활이 아니었다면 이만한 학문적 성과물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산초당에 가보면 여기에 정착한 때부터 정약용은 사실상 귀향을 거의 포기한 것 같다는 느낌인데, 오히려 그 점이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는지 차분히 들어앉아 공부와 학문 연구를 시작하고 제자들을 키워냈다. 18년 간의 오랜 유배 생활이 풀렸을 때 오히려 서운했을 것 같다는 느낌도 있다.  


다산초당 가는길 - 나무뿌리가 온전히 드러나 있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귤동마을 입구에서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남도 땅의 정겨움을 반영하듯 급한 경사가 없이 구불구불하면서 찬찬히 올라간다. 한낮에도 햇볕이 잘 들지 않을 듯한 숲을 지나 잠깐 오르면 단정하게 가꾸어놓은 초당에 닿는다

이 마을의 해남 윤씨가들이 오랜 세월 잘 가꾸어왔다는 느낌이 든다. 단, 초당 답게 초가집으로 복원하지 않고 우람한 기와집을 만들어서 지금까지도 비판받고 있지만. (이제 와서 기와집을 헐고 다시 초당을 만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신중하게 잘 해야 한다)


천일각.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좋다. 


  백련사로 이어지는 길가에는 전망 좋은 천일각이 있고, 나무 뿌리들이 그대로 드러난 산길을 따라 산을 넘어가면 백련사로 이어진다. 차분하게 사색하기에 좋은 최고의 명상길이다

이 길을 통해 유배지에서 친하게 지낸 혜장선사, 그리고 제자로 받아들인 초의선사가 백련사에서 수시로 오갔다. 그렇게 생각하면 단순히 매력 있는 길이 아닌, 내력 있는 길이다.

  

정약용의 거처였던 동암 


  다산의 제자 초의선사의 거처였던 해남 일지암에 들러보자. 강진에서 그리 멀지 않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서 걸어 올라가는 일지암. 초의선사가 말년에 40여 년간 기거하며 손수 차를 일구었다는 일지암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0년 한국차인연합회에서 옛 주춧돌 위에 복원해 놓았다


초의선사의 거처였던 일지암. 


  아울러 일지암 앞에는 실제로 차를 생산하는 차밭을 만들어 놓았으니 한국 다도의 성지라는 이곳에 들러 초가집 마루에서 두륜산 낮은 봉우리들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다

운이 좋으면 이곳에 기거하는 스님으로부터 차 한 잔 정도는 얻어 마실 수 있다. 그리고 이 암자 마루에 걸터앉아 눈앞을 바라보면 훤히 트인 하늘이 시원스럽다


일지암에서 바라본 두륜산 줄기


  일지암에서 산으로 길을 재촉하면 두륜봉과 두륜산 일대의 봉우리들에 닿는다. 일지암이 목적이 아니라도 산행시에 잠깐 들러 마루에서 쉬었다 가면 좋을 곳이다.



가는길: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종점에서 2번 국도남해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강진IC에서 나온다. 강진읍을 거쳐 해남 방향 18번 국도다산초당 안내판을 보고 좌회전도로를 따라 7km 진행하면 우측으로 다산초당 입구가 나온다. 사의재는 강진읍내 강진군청에서 동쪽길로 따라가면 좌측에 자리 잡고 있다.


대중교통으로는 광주종합버스터미널(062-360-8114, www.usquare.co.kr)에서 강진으로 가는 시외버스(10~20분 간격 운행)를 이용, 강진에 간 다음, 강진에서 군내버스로 다산초당까지 간다

(강진 시외버스터미널 061-432-9666)

 

잠잘곳: 

다산초당 인근의 슬로우펜션(010.7941.6595,  www.slowpension.co.kr )  정도가 괜찮고, 이외에는 숙박시설이 마땅치 않다. 강진읍내의 모텔과 여관을 이용하거나 찜질방을 이용한다. 보금모텔(061-433-4765), 탑모텔(061-434-8816), 대궐사우나찜질방(061-434-1000)

 

맛집: 

강진읍내에는 유명한 한정식 집들이 많다. 버스터미널 앞 백반집들의 백반도 그럭저럭 먹을 만할 정도로 맛의 고장이다. 이름난 한정식집은 해태식당(061-434-3031), 명동식당(061-434-2147), 청자골종가집(061-433-1100) 등이다. 강진읍 남쪽 목리의 목리장어센터 (061-432-9292) 장어구이도 괜찮다.


목리장어센터의 장어구이



* 이 글은 2014년 전남도청에서 펴낸 "전남 남해안 이야기" 책에 제가 쓴 글을 수정, 보완하여 사진과 함께 포스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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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 103-3 |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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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 그 바다를 가다

 

녹진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울돌목, 빠른 물살이 여기서도 보인다


  불패의 명장으로 우리 역사와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순신, 지금껏 그의 이름과 승전을 내건 영화나 드라마도 열손가락 이상 꼽을 정도로 끊임없이 소재가 되고 있는 인물이다

우월한 선진적 전술, 철저한 준비, 강력한 리더십, 어느 하나 빠짐없는 신화를 기록한 이 인물의 수많은 승전 중에서도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마저 반전시킨 최고의 극적인 드라마가 해남과 진도 사이의 바다, 울돌목, 명량에서 쓰였다.


 

  임진왜란 당시 막강한 일본 수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지만,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백의종군해야 했던 이순신, 그 후 칠천량해전에서 130척이 넘는 조선 수군이 왜군에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남해안을 돌며 수습한 배는 12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수군 철폐 명령을 내린다. 그 때 이순신이 이를 반대하는 유명한 장계를 올렸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지하면 이는 적이 바라는 것으로, 적은 호남을 거쳐 한강까지 쉽게 진격할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1597815, 장계를 올린 이순신은 그날 밤 과음으로 잠들지 못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하였다

인간적인 모습이다. 자신이 키운 수군을 모두 잃고 남은 배들을 모아 다시 싸우고자 하는데, 수군을 없애라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 중앙정부의 탁상공론으로 내려온 잘못된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하여 반역죄로 끌려가 당한 고문의 후유증은 여전히 몸을 괴롭혔다.


  15978, 이순신은 전남 장흥 회진포에 도착하여 남은 12척의 배와 새로 합류한 1척의 배, 13척으로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1597916일 운명의 날, 133척의 왜군 대선단은 의기양양하게 진도의 울돌목으로 들어섰다

 ( 왜군 규모를 330척이라고도 하는데, 이순신 본인은 133척이라고 하였다)

우수영에서 나온 이순신의 13척 전함도 울돌목에 일렬로 포진한다. 왜군은 한눈에 다 들어오는 13척의 조선 전함들을 비웃으며 전진하였다. 13척의 전함 가운데 이순신의 전함이 먼저 앞으로 나가 적선과 맞섰다.


퍼옴

퍼옴


  그로부터 2시간 후, 울돌목에 남은 배는 조선 수군의 배 밖에 없었다. 물살이 거센 좁은 수로에서 적은 수의 이순신 함선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고, 우습게보고 덤볐던 일본 배들은 서로 뒤엉켜 혼란에 빠졌다

결국 불타고 부서져 격침된 왜군의 배는 31, 심하게 파손되어 달아난 왜군의 배는 90여 척, 13,000여 명에 가까운 왜군의 8천여 명 정도가 바다에 수장되었다. 반면 조선 수군의 전함은 단 한 척도 피해가 없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천행이다.”라고 기록했지만, 운이 좋았다는 명장의 한마디는 거꾸로 철저한 사전 계획과 전술에 의한 준비된 승리였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임진왜란, 정확히 말하면 난전으로 치달은 정유재란의 한 분기점이 되어 왜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약화시켰고, 이후부터 왜군은 일방적으로 몰리게 된다. 


녹진전망대


  이 역사의 현장에 가보자. 이순신이 당시 해협에 걸쳐 쇠사슬을 설치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구간이 바로 지금의 진도대교라고 한다. (쇠줄의 설치는 실제 사실인지 아닌지 논란 중이다)


  진도대교를 건너 녹진전망대에 오르면, 그야말로 진도와 해남 일대의 바다와 다도해의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많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오며, 울돌목의 좁은 수로가 모두 잡힌다. 훌륭한 전망이다

이곳에서는 그날의 긴박했던 전투 상황을 상상으로라도 되짚을 수 있다


  본래 이순신 군대의 거점은 진도 동북쪽 벽파진이었지만, 울돌목을 뒤에 두고 싸우면 불리하다는 판단 아래 우수영(지금의 해남군 문내면)으로 이동하여 거점을 마련한 다음, 울돌목으로 들어가 싸운 것이다. 진도대교 쪽 바다로 접근하면 울돌목 해안가에 이충무공 승전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충무공 동상을 중심으로 목조 데크길을 따라 가벼운 산책도 할 수 있어 좋다.


이충무공 승전공원의 산책로 


  한편, 해남 쪽 울돌목을 내려다보는 우수영관광지는 이 울돌목 바닷가 일대에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실내 전시관에서 명량대첩과 관련된 유물과 거북선 모형을 구경하고 야외 공원과 전망대를 돌아보면 된다

  진도대교 건설 이후에 울돌목의 거센 물결과 격한 소리는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물살은 빠르고 물이 부딪히는 소리는 때때로 맹렬하다. 물살이 회오리를 일으키는 모습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바다를 전쟁터로 삼다니... 이순신은 상황이 유리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승부를 결행한 최고의 승부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허락할 경우 진도 안으로 들어가 이순신 부대의 본거지였던 벽파진, 고려 때 삼별초의 항전지였던 용장산성과 조선 후기 남화의 성지로 불리어지는 운림산방을 같이 돌아보면 좋다. 벽파진은 지금 쓸쓸해 보일 정도로 상당히 한적한 항구로 남아 있고 뒤쪽 언덕의 기념비만이 이순신의 해군이 주둔했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한적한 벽파진 


# 여행 정보

 

가는길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종점에서 2번 국도삼호대교를 건너 우회전, 해안도로를 따르며 영암방조제금호방조제를 건넌다. 그리고 국도 77호선을 따라 진도 방면으로 내려가면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에 닿는다. 진도대교 건너기 전 좌측에 우수영관광지가 있으며, 진도대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면 녹진전망대 가는 길이 있다.

대중교통으로는 광주종합버스터미널(062-360-8114, www.usquare.co.kr)에서 목포를 거쳐 진도로 가는 시외버스(하루 12회 운행)를 이용, 진도에 간 다음, 진도에서 군내버스로 녹진까지 간다. 해남과 진도 간에도 시외버스가 하루 7회 운행되며, 서울(센트럴시티터미널)과 진도는 하루 4회 직통 버스가 운행된다.

(진도 시외버스터미널 061-544-2141)

 

맛집

보통 남도 한정식이 좋다 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아 여행객들이 먹기에 부담스러운데, 해남에서 진도대교 건너기 전 우측에 있는 선두리항 입구의 별미가든(061-532-2219)은 저렴한 가격에 남도의 싱싱하고 풍성한 밥상을 받을 수 있다. 해남쪽 진도대교 입구의 임하식당(061-535-3121)도 가격 대비 반찬이 20여종 가까이 나와 괜찮다. 인근의 명승가든(061-534-7770)은 외관이 깔끔하며 청정 해역에서 잡은 생선회와 토종닭 코스요리가 일품이다.


임하식당 백반상(1인상도 가능) - 1인 7000원 상이다. 

 

숙박

진도 쪽에는 폐교된 군내초등학교를 매입, 미술관과 숙박시설, 오토캠핑장을 마련한 진도미술관 동심(061-543-8787), 의신면 초사리 진도마린빌리지(061-544-7999, www.marinvil.co.kr), 진도읍 해창리의 진도스케치민박(061-542-2114) 등이 괜찮다. 진도읍의 모텔 시설들을 이용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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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 울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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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후와 충주산성 - 몽골의 침략을 이겨낸 리더십과 저항의식

 


충주산성 동문 일대


125312, 

몽골의 5차 침입 당시 충주시 남쪽 충주산성은 예구가 이끄는 몽골군 주력과 대치하며 10월부터 두 달 이상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제 식량은 거의 떨어졌고, 성 안의 주민들과 방어병들은 지쳤다. 이미 충주까지 내려오는 동안 남자 10세 이상은 모두 죽이고 여자는 포로로 잡아가는 대량 학살을 몇 번 씩 자행한 몽골군은 살기에 넘쳐 있었다.

이때 방호별감 김윤후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외쳤다.

 

여러분! 이 성을 끝까지 지켜내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여러분 모두에게 관직을 내리겠습니다. 모두 믿으시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그리고는 주민들 앞에서 관노비의 명부를 불태우고 몽골군에게 빼앗은 소와 말을 나누어주었다...

힘을 얻은 방어군과 주민들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몽골군의 파상 공세를 막아냈다.

 

- 노비문서를 불태우면서까지 노비와 주민들을 독려해야 하는 상황, 아마 성이 함락되기 직전, 절체절명의 위급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성과 주민들을 버리지 않고 싸웠던 김윤후는 진정한 승부사였다.

 

1218고려사에는 충주에서 몽골군이 포위를 풀었다는 것을 급히 알렸다는 기록이 있다. 몽골 사령관 예구는 충주성의 실패로 경질되었고, 몽골은 침략을 중단하고 돌아갔으며, 김윤후의 약속은 고려 정부에 의해 지켜졌다.


충주산성 성벽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투 중 한 장면이 충주에서 펼쳐졌다. 몽골군의 1차 침입 때 지휘관과 책임자들이 다 도망가고 노비와 하층민들만으로 성을 지켜냈던 충주는 5차 침입에서 다시 한 번 드라마를 만들었다.

 

1차 침입 당시 몽골을 몰아낸 다음 도망쳤다 돌아온 관료들은 자신들이 도망간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탄압을 가했다. 화가 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봉기를 일으키자 당황한 정부가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킨 적이 있다.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충주 주민들은 이런 배신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자기들을 지휘해야 할 사람들이 꽁무니를 뺐다가 기껏 목숨 걸고 싸워서 그 살벌한 몽골군을 물리쳤더니, 돌아와서 상은 주지 못할망정 자기들을 탄압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보낸 지휘관, 이번에는 양심적이고 책임 있는 지휘관, 2차 침입 때 적장 살리타를 죽인 전쟁 영웅, 김윤후(?~?, 생몰연대 미상)였기에 그들은 기꺼이 함께 싸웠다. (김윤후가 아니었다면 과연 충주 주민들이 싸우기라도 했을지 모르겠다) 신뢰를 얻은 김윤후였기에 가능한 승리였다.

 

김윤후가 몽골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한 처인성 


김윤후는 몽골의 2차 침입 때 지금 용인 지역의 처인성에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몽골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한 당대의 전쟁 영웅이었다. 

어찌 보면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강감찬 등의 전쟁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할 승전을 기록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아니, 객관적으로 불리한 전투의 전면에서 위험한 지휘를 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면에서 보면 오직 이순신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다. 을지문덕이나 강감찬은 직접 전투의 전면에서 적을 상대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순신도 하지 못했던 최고 사령관을 죽인 인물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에 비유하면 왜군 선봉장이자 최고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카를 죽였다는 의미이다)

 

몽골의 세계 정복사에서 전면에 선 정복 사령관이 전쟁 중에 상대방 군사에게 사살당한 경우는 굉장히 드문 사례다. 실제로 처인성에 가보면 이렇게 작은 성을 지켰을 병력이 어떻게 몽골 주력군을 상대로 사령관까지 죽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건 지금도 의문이다. 처인성 현장에 두 번 가보았는데, 여전히 내게는 수수께끼다. 그저 처인성이 아닌, 주변 어딘가에 잠복했다가 기습적으로 저격하듯 화살을 날린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정말 그랬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윤후가 존경받아야 할 진정한 이유는 그의 태도이다. 살리타를 죽인 뒤 정부가 그에게 큰 상을 주려고 했을 때, 그는 자기가 살리타를 죽인 것이 아니라며 이를 거부하고 체면치레를 할 만한 작은 상만 받았다. 적장-그것도 최고 사령관-을 죽였다면 누가 죽였든 지휘관에게 큰 상이 돌아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군대 상벌 규정의 원칙이다.

역사에 남을 만한 성과를 거두고도 그는 자기의 공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공을 돌리기도 했다. 말이 쉽지 실제 그러기는 어렵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일관된 삶을 살았다. 당대 고려의 백성들이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 알 만하다.

 

그래서 충주 전투의 승리는 김윤후가 아니었다면 이루어내지 못했을 승리라고 하는 것이다. 전투 현장이든 스포츠 경기의 현장이든, 지휘관의 용기와 능력, 책임감이 그를 따르는 병사와 선수들에게 신뢰를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충주산성 동쪽 성벽

 

이제 역사는 기록으로 남고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그저 그날의 상상이 가능한 충주산성으로 가보자. 충주시 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친 남산(금봉산, 636m)은 남한강을 낀 교통의 요지 충주를 지키는 천연의 방벽 역할을 한 곳이다. 이 산 정상부를 빙 둘러싼 산성이 충주산성(일명 남산성)이며, 몽골 침입 당시 몽골군을 물리친 산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충주성 전투의 현장이 대림산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충주에서 수안보로 가는 길에 위치한 산성인데, 이쪽이 오히려 유력하다고도 한다. 어디가 현장이든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데, 그래도 지금의 충주산성임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대림산성은 충주에서 수안보를 거쳐 문경새재로 가는 주 교통로상에 있다. 이곳에 충주 주민들이 들어갔다면 몽골군과의 한 판 승부를 이미 각오했어야 한다. 주 교통로상에 떡 하니 버티고 있으므로 몽골군이 경상도로 내려가려면 이 산성을 반드시 점령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지나가는 길옆의 산성에서 웅크리며 빤히 보고 있는데, 그냥 지나가는 군대가 어디 있을까. 그에 비해 충주산성은 주 교통로상에서 좀 떨어진 충주 남산 정상부에 있다. 전형적인 피신용 산성이다.

나는 몽골의 5차 침입 당시 충주 사람들이 몽골군과 피할 수 없는 정면대결을 벌이기보다는 일단 피신해서 농성을 벌이는 쪽을 택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혹시 그냥 지나치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섞인 기대감을 갖고. 심리적으로 이쪽이 맞지 않을까. 결과적으로는 몽골이 그냥 지나치지 않아 전투가 벌어졌지만. 사실 나 같아도 이미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초토화작전을 벌여 춘천(당시 춘주) 같은 동네의 경우는 주민들 전체와 어린아이까지 완전히 몰살시키면서 남하하는 이 살벌한 군대와 절대 피할 수 없는 전투를 각오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현장은 지금의 충주산성이 맞을 것이라고 본다. 내 단순한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굳이 하나 덧붙이자면, 양쪽 산성을 비교해보면 대림산성은 몽골군이 집중 공격할 지점이 있지만, 충주산성의 경우 대규모의 군대가 집결하고 집중 공격할 지점도 마땅치 않다. 장기 방어를 위한 버티기에 유리한 곳이다...)


마즈막재에서 충주산성 가는 길 풍경


남산과 이웃한 계명산과의 사이에 마즈막재라는 고개가 있다. 충주산성을 가려면 일반적으로 이곳에서 2.2km의 산길을 걸어 올라간다. 오르는 길에 보이는 북쪽 편 충주 시가지의 모습과 동쪽 충주호와 산줄기들의 전망이 꽤 좋다. 비교적 평탄한 산길로 정상부에 오르면 척 보기에도 쉽게 공략당하지 않았을 산성의 위용이 나타난다.

 

충주산성은 둘레 1,120m, 높이 약 6.5m의 돌로 쌓은 산성으로, 산 정상부에 테를 두르듯 쌓았다 하여 테뫼식 산성으로 분류한다. 복원한 부분까지 포함하여 성 전체를 걸어서 한 바퀴 돌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잘 복원, 정비된 동문 쪽이다. 경사가 가파르기는 하지만, 임도에서 성벽이 잘 보이기도 하고 접근하기도 쉽다. 전투가 벌어지면 이쪽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을 법한 곳이다.


동문 바로 안쪽의 우물 


산성이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구불구불 뱀처럼 돌아나간 모양도 인상적이지만, 동문 위에 올라가 바라보는 장쾌한 전망도 좋다.

동문 안쪽에는 석축으로 둘러친 연못이 복원되어 있다. 연못은 식수에 필요한 물을 모아 놓는 집수지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급박한 전투에서는 적의 화공을 막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성벽 가까이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식수보다는 방어용일 가능성이 높은 듯하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성 안쪽에 남산 정상이 있다. 정상부 근처에 비교적 평탄한 부분과 숲이 있는데, 왠지 이곳에서 김윤후가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음직한 상상이 든다.

 

남아 있는 흔적 속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 성에서 실제 적과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스토리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공을 넘나드는 감동을 준다.

 

양심과 책임감을 가진 지휘관의 리더십, 강력한 적 앞에서 오랜 경험과 끈질긴 저항의식으로 무장한 주민들의 단결력, 이 두 가지가 결합한 충주산성의 승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특히, 책임감으로 리더십을 발휘해야할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요즘 같은 때라면 더욱 그렇다.

  

 

# 여행 정보


가는길

중부내륙고속국도 충주IC~국도 3호선 충주 방향~충주 시내~안림로를 따라 마즈막재 정상에 오른 후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00m 진행하면 충주산성 오르는 주차장이 나온다

대중교통으로는 충주 시내와 충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종민동 행 515번 버스가 마즈막재까지 간다(하루 4). 비교적 자주 다니는 116, 119번 버스를 이용, 의료원 입구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는 것이 시간의 구애를 덜 받는다.

 

맛집

마즈막재 오르는 길가 늘해랑(043-846-5800)은 깔끔한 밑반찬과 함께 국내산 한우와 돼지갈비를 모두 내는데, 가벼운 식사로 손칼국수도 괜찮다

같은 길가의 샤브락(043-853-4949)은 해물 샤브샤브, 버섯 소고기 샤브샤브를 주력으로 내는데, 깨끗한 분위기에서 맛깔난 밑반찬과 함께 식사할 수 있다.

충주 시내로 들어가면 문화동의 운정식당(043-847-2820)이 올갱이해장국의 원조로 꼽히며

성서동 아주식당(043-847-2998)의 토속적인 순대와 봉방동 충주사과순대(043-851-7707)의 사과순대도 좋다.

 

숙박

충주 시내에 깔끔한 호텔과 모텔들이 제법 있다.

충주그랜드관광호텔(043-848-5554, www.cjgrand.com),

렉시모텔(043-847-8874), G모텔(043-848-6410, www.gmotel.kr) .


충주댐 근처의 레이크사이드펜션(070-7750-2372, www.lake-side.co.kr), 마즈막재 너머 충주호반의 충주호반펜션(043-856-2031, www.chungjuho114.com) 등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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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시 직동 산 24-1 | 충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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