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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남산 석가사지와 불무사지

 

 

 

 

"폐하도 진신석가를 만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서기 699, 신라의 효소왕은 당나라 황실의 복을 빌려고 지은 망덕사의 낙성회에 참석하였다. 왕실이 직접 돈을 내서 만든 절이니 생색도 낼 겸 시간을 내서 화려하게 행차했을 것이다.

 

그때 행색이 거의 거지꼴인 승려 한사람이 몸을 구부리며 들어와 왕에게 요청하였다.

 

빈도도 이 재에 참석시켜 주십시오.”

왕은 끝자리에 앉도록 허락하였다. 마음속으로야 탐탁치 않았겠지만, 겉으로는 왕의 관대함을 보여 줘야 했을 것이다.

 

행사가 끝나자 왕은 가벼운 마음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파암에 있습니다.”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게나.”

 

그러자 승려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도 남들에게 진신 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한 방 맞은 듯 놀라서 당황해하는 왕 앞에서 몸을 솟구치더니 하늘에 떠서-무슨 아이언맨처럼- 남쪽으로 사라졌다.

 

비파골의 이름을 낳게 한 비파암

 

왕은 놀랍고 부끄러워서 사람을 시켜 빨리 쫓아가도록 하였다.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진 승려를 어떻게 쫓아갔는지는 모르지만, 그 승려를 놓치면 안 되는 추적자는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을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실무자는 피곤하다.

아마 날개 달린 천마라도 타고 추격한 모양이다. 결국 승려를 찾아냈다.

 

승려는 망덕사에서 바라보는 남산을 넘어가 삼성곡 어느 바위에 지팡이와 바리때를 벗어놓고 사라져버렸다. 오랜만에 하늘을 날았더니 힘들고 몸에 땀이 나서 벗어놨는지, 아니면 일부러 흔적을 남기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추적자는 이를 확인하고 돌아가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비파암 아래에 석가사를 세우고, 그가 사라진 바위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나누어주었다.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 감통 편에 있는 이야기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효소왕과 이름 없는 승려의 이야기가 전하는 현장, 망덕사지

 

설화에 숨은 시대 현실과 비판 의식

 

왕이 일반인을 향해 날 만났다는 걸 말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불교와 관련된 설화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럴 때 등장하는 일반인은 보통 가난하거나 볼품없이 생긴 사람, 혹은 아이들이다. , 대개 사회적 약자로 보이는 사람들인 셈.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갑자기 그가 왕도 석가(혹은 보살)를 만났다는 걸 말하지 말라고 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왕이 당황해서 쫓아가지만 -물론 왕의 체면이 있지 자기가 직접 쫓아가지는 않는다- 그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차적으로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종교적 권위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보통 종교계 쪽에서 나온다. 최고의 현실 권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에서 왕은 항상 자신을 낮추고 종교계에 무엇인가를 베푼다.

 

하지만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화려하고 겉치레가 많아진 왕이라는 현실 권력에 대해서 스스로를 낮추고 본질을 추구하라는 일반인 혹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다. 약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우습게보지 말라는 의미에 더하여 종교에 현실의 권력 관계가 반영되는 세태를 비판한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신분의 격차가 불교에 그대로 반영되어 불교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알고 보면 이 초라한 행색의 승려가 했던 말은 왕에게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당시 망덕사 낙성식에 참여한 어느 승려가 실제로 했던 비판적인 목소리가 반영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남산 능선에서 내려다본 비파골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기를 온몸으로 겪은 동시대 사람이다.

그것도 세속을 초월해 도만 닦은 승려가 아니고 왕에 의해 국사의 자리까지 올라간 승려이다. 몽골 침입에 온 국토가 유린당하는 모습과 동시에 강화도에 피난 간 최씨정권과 불교계가 강화도에서 호의호식하며 온갖 행사와 이벤트를 벌이면서도 정작 몽골군과 정면 대결해서 싸우지는 않는 모습을 보며 당시의 현실 권력에 비판적인 의식을 갖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 이야기가 실린 감통 편의 몇몇 이야기들은 은근히 현실 정치권력과 불교계의 허위의식을 비판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 곳곳에서는 신라 때의 빈부격차와 화려한 면에 가려진 어두운 면이 자주 고발되고 있다.

 

<삼국유사>가 교과서 표현처럼 단순히 고려 후기 몽골 침입에 맞서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한 역사서만은 아닌 셈이다.

 

, 물론 이 본질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변질시켜서라도 기어이 자기 과시욕을 드러낸 왕도 있다. 조선시대 세조다.

 

강원도 오대산에서 동자로 변신한 문수보살을 만나 피부병을 치료하지만-여기까지는 위 이야기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문수보살이 자기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사라졌으니까-, 상원사에 숨은 자객을 고양이가 튀어나와 알려줘서 암살을 피하는 기적을 만난다. 본래 이야기에 덧붙여진 이야기이다. , 자기가 천명을 받아서 쉽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어느 소나무가 자기 지나갈 때 알아서 팔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정2품의 파격적인 벼슬을 내린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이 소나무에 자객이 숨어 있는 것을 소나무가 가지를 들어 숨은 자객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어느 이야기든 본질은 같다) 이런 파격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은 왕 이외에는 없으니 국왕의 권위와 권력을 한껏 과시한 셈이다.

 

불교 사찰과 관련된 스토리에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 스토리가 포함되었으니, 세조의 이런 자존감과 과시욕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물론 불교를 철저히 억눌렀던 억불정책의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불교를 보호한 왕이었으니 이런 스토리를 넣어도 불교계가 뭐라고 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래서 오늘날 남아 있는 세조와 불교계와의 스토리에는 왕이 자신을 낮추거나 고개를 숙이는 예가 없다. 항상 불교계 위에 서서 불교계에 뭔가 특혜를 내리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왕의 권위와 권력을 빌려서라도 생존이 절박했던 조선시대였으니 당시 불교계는 이런 이야기 구조를 인정하지 않았을까.

 

하여간 <삼국유사>에 실린 이 이야기는 왕과 불교계, 그리고 당시 시대 현실을 어느 정도 통찰할 수 있는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왕권과 친밀하고 가까우면서 지배세력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때로는 왕권을 견제하거나 비판하기도 하고 당시 신라의 일반 백성들과의 연계 고리 역할도 하는 불교계의 모습도 담겨 있다.

 

초라한 승려로 변신한 석가의 흔적이 마지막에 머무른 곳이 당시 신라인들의 성지이자 마음의 고향이랄 수 있는 남산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신라 민중들이 어렵지 않게 불교를 가깝게 대하고 그들의 신앙심이 골짜기마다 곳곳에 펼쳐진 경주 남산.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루트(남산 동쪽과 토함산 일대)에 왕권과 왕실, 신라 지배층의 힘과 영향력이 표현된 사찰과 문화유산(불국사, 석굴암,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신라 및 통일신라 여러 왕의 무덤 등)이 많이 남아 있다면, 경주에서 양산으로 가는 남산 서쪽 루트는 상대적으로 토착적, 민간적 요소가 강한 문화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바로 이 남산 서쪽 골짜기, 석가의 흔적이 머무른 곳이 지금의 석가사지와 불무사지이다.

 

                                                        석가사지 주변 탑의 부재들

 

 

남산 석가사지와 불무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고행길이다

 

초라한 승려로 변신한 석가가 망덕사에서 남산을 넘어 약간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골짜기는, 이 남산 서쪽의 숱한 골짜기들 중 현재 비파골이라 불리는 골짜기이다.

왕이 승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을 때 승려가 비파암에서 왔다고 했는데, 그 이름을 따서 비파골이라 했던 것 같다.

 

석가사지와 불무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고행의 길이다. 길 찾기가 어렵다. 개인적으로 작정하고 찾아갔어도 두 번을 찾지 못하고 실패했던 길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사찰들이 지금은 폐사된 지 오래인데다 복원도 되어 있지 않아 길의 흔적 자체가 상당히 지워져 있다. 그래서 숲이 무성하게 우거지는 5~10월 정도까지는 접근도 어렵다. 그러니 겨울이나 초봄에 찾아가야 한다.

 

이곳에 가려면 남산 서쪽에서 가장 유명한 삼릉골을 지나 용장4리 버스정류장을 찾아가야 한다.

그 건너편이 비파골 입구이다. 비파골 입구에서 길을 더듬어 골짜기를 타고 오르다 길이 헷갈리는 지점들이 나타난다. 보통은 오른쪽으로 보이는 희미한 흔적의 길로 가야 한다.

실수로 왼쪽 길로 접어들면 비파골 3층석탑(정식 명칭은 비파곡 제2사지 삼층석탑)을 만날 가능성이 높은데, 이 탑을 지나면 능선을 따라 정상부로 올라간다. ,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놓치지 않고 석가사지를 찾아가려면 갈림길이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아무런 안내판과 표시도 없는 희미한 길을 따라 가다 잘 보면 우측으로 밑둥을 잘린 나무가 작은 계곡을 건너 걸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나무를 찾으면 놓치지 않고 석가사지에 갈 수 있다.

이 나무가 걸쳐진 작은 계곡을 건넌다. 물이 흐르지 않는 아주 작은 계곡이라 그냥 걸어서 건너가면 된다. 그러면 역시 희미하게 길이 이어진다.

 

석가사지는 길을 따라 가다 경사가 급해지면서 사방의 조망이 트인 시점에 나타난다. 남산 정상에서 흐르는 능선과 이 능선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들이 한눈에 잡힌다. 사실 공식적인 명칭은 비파곡 제3사지이다. 이곳이 석가사지라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가파른 경사면에 지어진 사찰이었을 듯 돌로 쌓은 축대가 남아 있다. 이 돌 축대가 눈에 잘 띠기 때문에 이를 통해 이곳이 석가사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일대 경사면 곳곳에 석탑의 옥개석과 몸돌로 보이는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대개 주변을 봐선 그리 큰 사찰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이곳에 탑만 있었고, 실제 사찰 건물은 그보다 아래쪽 비파암에 가까운 바위군 아래의 사찰터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비파암 아래에 석가사를 세웠다고 하니 비파암 아래의 사찰터가 진짜 석가사지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어느 쪽이든 본격적인 발굴이 되어야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가가 지팡이와 바리때를 벗어놓고 사라진 바위 위에는 불무사가 있었다 한다. 이 불무사지는 석가사지 오르는 길가의 왼쪽 바위군 옆 희미한 길을 따라 올라가야 닿을 수 있다. 길을 잘못 가면 두 손 두 발 다 쓸 수도 있다.

 

불무사지

불무사지의 기와 파편들

전망 좋은 한 무더기의 바위군이 불무사지인데, 이 바위에 사찰 건물이 올라 타 있었다는 것이 얼핏 납득이 가지 않기도 한다. 전남 구례 사성암처럼 바위에 기둥을 박거나 바위에 기대어 기둥을 세운 다음 사찰 건물을 올려놓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주변에 수많은 기와 파편들이 지금도 흩어져 있어 건물이 있었음은 분명히 확인된다.

 

이 불무사지에서 왼쪽으로 내려다보면 석가사지가 잘 보인다. 석가사지의 전체적인 모양새를 확인하려면 이곳에 오르는 것이 확실하다. 시선을 조금 들어보면 석가사지가 들어선 골짜기와 남산 산줄기들의 모양새가 한눈에 잡힌다.

 

만약 골짜기의 이름을 낳게 한 비파암을 보고 싶다면 다시 산길로 내려와 조금 걸어 내려가서 우측으로 난 길을 찾아야 한다. 불무사지 가는 길보다 찾기 더 어려운데, 일단 길 따라 2분만 오르면 하늘을 뚫고 올라갈 듯한 비파암의 수려한 모습을 대할 수 있다.

 

사실 전체적으로 석가사지와 불무사지를 돌아보면, 주변 풍경은 수려하나 골짜기에 남은 과거의 흔적은 초라하다. 전망은 괜찮지만 주변 산줄기들이 꽉 막혀서 답답하다는 느낌도 있다. 사람의 발길도 워낙 드물어 하루에 한 사람이나 찾아가나 모르겠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남은 이야기는 이 사찰터들의 가치를 입증한다. 그래서 두 번 찾아가는데 실패했어도 다시 길을 찾아 들어가 결국 발견했다. 그러니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바위와 돌 축대, 깨진 석탑의 파편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이만큼이라도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에 보면 탑재가 모두 16매가 확인되었다 하니, 이로 보아 석탑 하나는 복원이 가능할 것도 같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골짜기 작은 사찰터에 탑 하나 세워지면 이것이 포인트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을 모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이 사찰터들이 덜 외로울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도 괜찮다.

정말 관심이 있고 역사서 속 설화의 현장을 찾아가서 그 설화 속 장면을 상상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만 찾아오는 곳, 천년 역사의 흔적을 조용히 감추고 있는 곳, 그래서 나만 아는 곳, 혹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곳으로 남아 있어도 좋다. 그런 곳이 전국에 한두 곳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답사 정보

 

* 차를 갖고 갈 경우 경주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남산 서쪽 길로 가면 경주교도소를 지나 용장4(앞비파마을)에 닿는다. 따로 주차장이 없으므로 주변에 대충 차를 세우고 용장4리 버스정류장 건너편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 대중교통으로는 경주 시내(고속버스터미널, 경주역 등)에서 500번대 버스(봉계, 내남 행)를 타고 삼릉, 경주교도소를 지나 용장4(앞비파마을) 정류장에서 내린다. 버스정류장 건너편에 최근에 지은 기와집이 있는데, 이 기와집 옆 작은 계곡 사이로 길이 있다. 이 길 따라 들어가면 비파골이다.

 

* 길을 알고 찾아가면 1시간이면 충분히 들어가지만, 잘 모르고 헤맬 경우 시간이 2배로 많이 걸릴 수 있다. 본문에서 말한 대로 5~10월에는 가지 말자. 안 그래도 길이 희미한데, 나무가 무성해지면 찾아가기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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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냥 2018.12.21 22:31

    정성스런 포스팅 잘보고갑니다.
    저도 꼭한번 가보고 싶네요.

 

첨성대의 수수께끼 -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가

 

10월 핑크뮬리가 한창일 때의 풍경

 

첨성대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

 

첨성대는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중 하나이며 국보 제 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첨성대를 한번쯤은 실물로 보았을 것이다.

 

20169, 진도 5.8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 첨성대의 균열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문화재 관리 당국은 첨성대 위쪽 정자석(井字石)이 북쪽으로 3.8cm 정도 이동했을 뿐, 큰 훼손은 없었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첨성대는 오늘날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식될 정도로 전국구의 명성을 갖고 있는 유명한 문화유산이다.

숭례문 화재 당시 수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했듯, 만약 첨성대가 붕괴되기라도 한다면 숭례문 화재 때와 비슷한 국민적 감정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첨성대에 대한 역사 기록은 정말 간략하다.

고려 중기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에는 아예 기록이 전혀 없고, 고려 후기 일연의 삼국유사에만 선덕왕 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 는 단 한 줄의 기록만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좀 더 자세한 기록이 있긴 하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구멍을 통해 사람이 속으로부터 오르내리면서 별자리를 관측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천문 관측을 했던 천문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이미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 900년 정도 이상 지난 시기여서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여간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재위(632~647)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높이는 9.07m이며, 2단의 기단부와 27단의 원통형 몸통부, 2단으로 된 우물 정()자 모양의 정상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아래로부터 4.16m 되는 높이에 사방 1m의 구멍이 있다.

실제 가서 보면 중간쯤에 뚫린 구멍이 1m나 된다는 데에 놀란다.

 

첨성대는 이후의 조형에서 상당한 참고가 되기도 한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올라간 모양새는 마치 고려시대의 청자를 연상시키며, 현재의 음료수 병의 모양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바닥은 원형, 꼭대기는 네모난 모양을 함으로써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모양이 대단히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후세 사람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조형물이기도 한 셈이다.

 

 

첨성대는 일반적으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통한다.

하지만 첨성대가 정말 글자 그대로 천문 관측을 했던 천문대냐 하는 데에는 수많은 의혹들이 있고, 숱한 학설들이 있다.

그간 학자들의 논쟁에 대해서 몇 페이지 분량으로 글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이른바 이 많다.

 

첨성대에 대한 의문과 논쟁

 

 

1960년대까지 첨성대는 천문 관측대로 알려져 왔지만, 이후 하늘을 관측하는 곳으로는 너무 좁거나 불편하고, 당시 경주 시내 중심부에 있었다는 이유로 별자리를 관측하던 곳이 아니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에 전() 서울대 물리학과 남천우 교수는 중간부의 창문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간 다음 내부의 사다리를 한두 번 더 타고 올라가 정자석 위에 넓은 판자 등을 깔고 그 위에 앉거나 누워서 별을 관찰했다고 주장하며, 천문 관측에 크게 불편함은 없었으리라 단정한다.

 

 

그러나 문제 제기는 계속되었고, 첨성대의 독특한 모양을 모티브로, 실제 천문 관측을 한 곳이 아니라 상징적 구조물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철저한 수학적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는 주장도 나왔다.

몸통부의 27단은 27대 선덕여왕을 상징하며, 정자석을 포함한 전체 28단은 동양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던 기본 별자리 28(宿)를 상징하고, 몸통부 돌의 숫자 362개는 1년의 음력 날수를 의미한다는 등의 주장이다.

 

일제강점기 휘문고 수학여행 온 학생들 기념사진 - 이때는 이렇게 첨성대에 자유롭게 올라갔다

 

상징적 구조물이라는 주장 중에는 첨성대가 우물을 상징한다는 견해도 있다.

정상부의 정자석은 우물의 윗모습과 비슷하고, 몸통부는 우물을 땅위에 올려 놓은 듯한 모양인데, 고대사회에서 우물은 풍요, 생산, 생명, 그리고 여성을 상징하니,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다 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연장에서 첨성대는 이 세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우주 우물의 상징인데, 이는 첨성대 자체에 선덕여왕이 하늘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신적 존재라는 상징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다.

비슷한 의미로 여신의 탄생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여신=선덕여왕 이라는 것이다.

 

기능적인 면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춘분, 추분에 햇빛이 창을 통래 바닥에 닿는 모습으로 절기를 관측하는 시설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천문대였다 라고 단순하게 아는 게 낫지, 이들의 학설과 주장을 대하면 대할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미궁에 빠져버려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사실 천문대였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기에,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도 대체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인식하고 있다.

 

계림에서 본 첨성대 야경

 

무엇보다 경주시나 문화재 당국, 혹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봐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천문대임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천문대가 아니라면 이 첨성대의 역사적 가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순식간에 추락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기에 첨성대를 보려고 오는 사람들이 많고, ‘국보로서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천문대가 아닌 그저 상징적 구조물이라면 9m 정도 높이에 불과한 첨성대가 오래됐다는 것 외에 무슨 큰 가치를 갖겠는가.

 

그러니 천문대가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면 굳이 이를 부정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더구나 일본 쪽에서 시비를 걸고 있다면 감정 때문에라도 더더욱 천문대여야 한다는 인식도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견해는?

 

여기서부터의 글은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첨성대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내 나름의 견해이다.

 

첨성대가 천문 관측을 했던 곳이 아니라는 의문이 자꾸 제기되는 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첨성대의 모양과 구조 때문이다.

 

모든 선입관을 배제하고 백지 상태의 눈으로 첨성대를 보았을 때 저 건축물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천문대로 보이는가?

 

나는 아니었다.

 

 

저 건축물이 천문대라면 실제 별을 관찰하는 천문 관측을 어떻게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편리하게 별을 관측할 수 있었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실제 눈으로 보면 저런 건축물에서 정말 편리하게 별을 관측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얼마든지 더 편하게 천문 관측이 가능한 구조물들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모든 의문의 해결은 상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실제로 별을 관찰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

일부 학자들 주장대로 천문대가 맞다면, 당시 관측자들은 출입구도 없고 계단도 없는 첨성대를 매일 사다리 타고 오르내려야 한다. 그것도 깜깜한 밤중에.

내부에 출입구와 계단을 만들어놓으면 충분히 편하게 오르내리며 관찰할 수 있는데, 그 첨성대 중간 윗부분에 뻥 뚫린 구멍을 사다리 타고 올라가 안전시설도 없는 곳에서 불편한 자세로 천문 관측을 해야 한다.

 

 

자칫하면 추락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다. 아니,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매일 밤(EVERY NIGHT) 천문 관측을 목숨 걸고 할 일 있나.

내부에 출입구와 계단을 만들 만한 기술이 없었나.

 

일부 학자는 아래에 출입구를 만들면 전체 구조가 약해져서 아래에 출입구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당시 이미 높이 80m 짜리(현재 아파트 28층 높이)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들었던 신라가 9m 짜리 건축물을 만드는데 출입구를 안 만들었다는 게 말이 되나.

 

, 바닥에 출입구를 만들고 내부에 계단을 설치하면 정상부에서 편안하게 별을 관측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만들지 않고 굳이 중간의 구멍을 통해서 들락날락했다는 것이다.

비상식적인 일이다.

 

 

매일 하는 일에 최대한 안전하고 편하게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상식이다.

전기와 전등이 없었던 시절 어두운 밤에 천문 관측을 한다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천문 관측이 목적이라면 애초에 저런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가장 안정적이고 일반적이라고 생각되는 천문대의 모양은 조선시대 창경궁 관천대관상감 관천대에서 볼 수 있다. 둘 다 주변보다 약간 높은 단을 쌓고, 단 위에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관상감 관천대는 현재 계단이 없지만, 과거에는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천문대의 상식적인 구조는 이런 모양일 것이다.

 

창경궁 관천대 - 천문 관측에는 이런 모양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심지어는 오늘날의 천문대도 기본적으로는 높은 곳에 단을 쌓고 내부에 계단을 설치하여 망원경을 두는 구조를 갖고 있다.

 

(고려 때 천문대로 남아 있는 유적은 정말 천문대였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것도 윗부분은 충분히 폭이 넓게 만들어져 천문 관측에 큰 불편함은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첨성대가 천문 관측의 상징물이든 종교적 의미를 가진 건축물이든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상징물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고 첨성대의 위치에 주목한다.

모든 학자나 전문가들이 첨성대가 본래 세워진 위치에서 이동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데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1400년 가까이 거목처럼 자기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점이 확실하다면 첨성대의 의미나 기능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확실한 점, 이 위치가 주는 의미를 따지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첨성대의 기능과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첨성대는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월성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계림에서 약 300m 정도 거리에 있다. 동쪽, 남쪽으로는 습지가 조성되어 계절마다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봄철의 유채꽃, 요즘에 조성된 핑크뮬리의 군락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런데 신라 때 사용된 궁궐은 초기부터 (반월성이라고도 부르는) 월성이고, 신라가 발전하면서 이 궁궐의 영역은 갈수록 확장되었다.

월성 주변의 동궁과 월지(안압지), 월성 북쪽의 평지에 다양한 궁궐 건축물들이 만들어진 흔적들이 있다.

 

단국대 사학과 전덕재 교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북궁과 남궁을 각각 지금의 월성 바로 북쪽(습지와 꽃밭이 있는 곳, 북궁터), 지금의 월성 남쪽 국립경주박물관 자리(남궁터)로 추정한다.

나도 동의한다.

 

, 오늘날 안압지 자리에 있었던 동궁과 함께 월성의 북쪽과 남쪽에는 북궁, 남궁도 있었다. 월성에는 왕궁이 있었고, 그 주변에 바로 붙어서 여러 궁궐 건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첨성대는 이 월성에서 걸어서 5분여 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따라서 신라 때에는 궁궐(북궁)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거나, 궁궐 바로 바깥쪽에 있었을 것이다.

 

- 지금 월성 바로 북쪽은 한창 대규모 발굴 조사 중인데, 첨성대 주변까지는 안 할 모양이라 좀 안타깝다 -

 

월성앞 봄 유채꽃과 벚

 

왕궁이 있었던 월성은 남쪽에 남천이 성벽을 따라 흐르고 있어 남쪽으로 문을 낼 수가 없다.

따라서 궁궐 정문은 남쪽이 아닌, 평평하게 열린 북쪽으로 날 수 밖에 없고, 이때 북쪽으로 직선거리의 대로가 있었다고 가정하면 첨성대는 그 길 위나 길가에 있었을 것이다.

 

현장에서 월성과 계림, 첨성대의 위치를 대략 가늠해서 신라 때 당시 모습을 추측해 보라.

 

궁궐에서 정문인 북대문을 나오면, 왼쪽으로 왕실에서 신성한 곳으로 보호하는 계림이 있고, 길 따라 좌우측으로 궁궐 부속 건물이나 주요 관청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길 위 혹은 길가 어디쯤에 첨성대가 있다.

 

 

아마 위치상 첨성대 주변에는 국가 기관이나 관청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나 오늘날에도 경복궁이나 청와대 앞 세종로를 따라 주요 국가 기관들이나 시설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궁궐이 가까이 있는데다 주변에는 높이도 제법 높았을 기와집의 여러 궁궐 건물과 관청 건물들이 즐비한 자리에서-주변에는 왕과 왕족들의 무덤도 즐비하다- 9m 높이 첨성대에서의 천문 관측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 천문 관측을 하지 않았더라도 첨성대는 천문 관측과의 관련성을 버릴 수 없다.

후세 사람들이 천문 관측을 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천문 관측과 관련이 있는 관청 앞에 서 있지 않았을까.

 

복원된 월성과 해자

 

결국, 첨성대는 어떤 관청과 관련되어 상징적 의미를 갖고 만들어진 건축물일 가능성이 높다.

왜 요즘에도 국가 기관이나 공공 건축물 앞에 그 기관의 기능과 관련이 있는 상징적 구조물이나 기념물이 서 있는 경우가 꽤 있지 않은가.

 

옛날부터 천문 현상은 정치적, 종교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일식이나 월식, 혜성의 출현과 같은 비일상적인 천문 현상은 꼭 정치, 종교와 관련지어서 해석했다.

때로는 가뭄, 홍수, 지진과 같은 재난이 일어나면 통치자(왕 혹은 왕을 포함한 지배층)의 무능이나 잘못을 나타내는 자연의 경고로도 해석하여 강한 정치적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대한민국도 그런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대규모의 자연재해는 민심의 불안과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재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정권의 명운을 결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첨성대의 건설은 천문 관측을 위한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왕이 천문 현상을 중히 여기고 자연재해를 사전에 감지하여 위험을 막고 정치를 바르게 하겠다는 상징적 의미, 집권자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여왕의 출현, 백제와 고구려 양쪽의 침공과 압박 등 대내외적인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당시 상황에서 왕이 하늘의 뜻을 잘 받들어 통치를 잘하겠다는 표현, 즉 민심의 안정을 위한 상징적 구조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지금은 국민의 여론을 파악하고 국민과 소통하며 국민의 뜻을 통치에 반영하는 것이 집권자의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당시 신라에서는 '하늘의 뜻'을 잘 파악하고 이를 잘 전달하면서 백성을 잘 통치하는 것이 왕의 미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뜻은 구체적으로는 천문 현상으로 나타나고, 하늘의 뜻을 파악하는 방법이 바로 천문 현상의 관찰이기 때문에 굳이 천문대 형상이나 천문 관측의 의미를 담아 만들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첨성대는 천문대 비슷한 모양이되, 실제 별을 관측하는 곳은 아니기에 내부에 출입구와 계단을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대신 좀 더 미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표현할 수 있었기에 지금의 독특한 모양이 되지 않았을까.

 

한편, 첨성대의 '()', 단순히 "본다, 관찰한다"는 뜻의 '()'이 아니라 "우러러본다"는 뜻을 가진 것도 하늘의 존엄성과 하늘의 뜻의 중요성을 표현한 글자가 아닐까 싶다.

단순 천문대라면 조선시대의 천문 관측 기관인 '관상감(오늘날의 기상대 격)'처럼 '()'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말이 참 길어졌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개인적으로 첨성대는 천문 관측을 위한 실용적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도의 상징성을 갖고 선덕여왕이 천문 관측 기관 앞에 설치한, 정치적 의미가 강한 건축물이라고 본다.

또 당시에 거대하게 조성된 황룡사 9층 목탑처럼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이해된다.

 

하지만 어떤 주장이든 첨성대의 기능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나 자료가 새로 나오기 전에는 지금까지의 논쟁은 계속될 것이고, 여전히 여러 가지 의문을 지닌 채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서 어정쩡하게 인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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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인왕동 910-30 |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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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방쌤』 2017.11.28 01:23 신고

    저도 천문관측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농경 위주의 사회였으니 민중들을 위해 날씨를 점쳐주기 위해 이런 곳을 만들었다,,
    그런 민중들에게 정부가 정당성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어주지도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한 번 해봤습니다.^^;;

    • 자유여행인 2017.11.28 06:59 신고

      감사합니다. 학문적으로는 천문관측대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이 많지만, 국민들이나 문화재 당국자들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 합니다.

  2. 영도나그네 2017.11.28 10:11 신고

    햐!
    정말 경주 첨성대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신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첨성대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라갔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구요..
    첨성대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것 같습니다..
    좋은 내용 잘보고 갑니다..

    • 자유여행인 2017.11.28 21:01 신고

      감사합니다. 첨성대 뿐만 아니라 고민거리인 문화유산들이 경주에 좀 있습니다. ^^;

  3. 루비™ 2017.11.28 17:41 신고

    저도 첨성대 사진을 자주 찍는데
    저보다 첨성대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계절에 찍으신거 같아요.
    멋진 자료와 심오한 해석 잘 보고갑니다.

  4. 空空(공공) 2017.12.01 11:43 신고

    첨성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질 읽었습니다
    저도 밤에 한번 가 보고 싶네요^^

    • 자유여행인 2017.12.02 06:49 신고

      ^^
      야경이 괜찮습니다.
      첨성대 바로 앞보다는 주변에서 거리를 두고 보십시오~

  5. 초월자 2019.04.06 08:15

    왜 이런 생각 못하세요?

    중앙 구멍이 첨성대
    그러면 연에서 중앙 구멍 오직 한국
    독특한 구조에 구멍이 첨성대와 방패연 존재

    빌 공 空 뜻 빈공간 하늘 뜻
    이게 첨성대도 빈공간 하늘
    방패연도 빈공간 구멍 중앙 하늘 날림.

    이러니 독창적 이유 설명가능
    한자뜻 확실히 이해.

    아무도 이런 접근 못함 이유
    방구멍이라고 괴상한 용어로 연사용
    이러니 구멍을 단순히 생각
    첨성대 신라

    김유신 연관련 존재
    유사성.
    이야
    우리나라ㅗ학계 연구안하고 문제
    늘상 논문위조조작대필이니 일반시민이 연구
    ㅉㅉ

  6. 첨성대진실 2021.09.12 08:48

    첨성대는 유목민족 이동식 텐트인 유르트를 본떠 만들었습니다.
    경주는 고대 흉노족이 세운 도시로 유목민 입장에서 해석하면 모든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고대 유목민들은 유르트 천장을 우물정자로 만들고 북극성을 관측했습니다.

 

# 경주 남산 천룡사지 - 신이한 절터, 우뚝한 삼층석탑

 

고위봉이 올려다보이는 천룡사지 삼층석탑

 

계림의 땅에는 객수 두 줄기와 역수 한 줄기가 있는데,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하늘의 재해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이 있을 것이다.

역수는 주의 남쪽 마등오촌 남쪽으로 흐르는 냇가인데, 그 근원이 천룡사이다.

중국에서 온 사자 악붕귀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이 파괴되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3권 탑상에 나오는 천룡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룡사지 가는 길. 천룡사지는 경주 남산에서 드물게 넓다란 산중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악붕귀는 신라와 당나라가 붙었던 나당전쟁 당시 신라의 의도를 염탐하려고 당에서 보낸 사신이다.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다시 당대 초강대국 당나라를 상대할 때, 한편으로는 당과 싸우고, 한편으로는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면서 화전 양면 전술을 쓰고 있었다.

악붕귀는 이때 사천왕사를 세워 당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는 신라 측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당에서 보낸 사신인데, 신라 측에서는 그에게 뇌물을 한 아름 안겨 수습한다.

사실 사천왕사는 신라가 부처의 힘을 빌려 당나라를 물리치려고 지은 사찰이다.

 

당으로 돌아간 악붕귀는 신라가 사천왕사를 세워 황제의 장수를 빌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뇌물의 힘인 셈.

이로써 신라는 당을 상대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천룡사지가 있는 산중 분지. 배추를 재배하고 있다

 

이 뇌물 좋아하는 악붕귀가 정말 천룡사에 왔을 리는 없다.

신라 말에 이미 폐사가 되어버린 천룡사의 처지가, 같은 시기에 멸망한 신라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나온 이야기로 추정된다.

 

삼국유사는 그 다음에 절이 다시 중창된 사연을 이어간다.

천룡사는 신라 말에 이미 폐허가 되었는데, 고려 초 최승로의 손자 최제안이 다시 절을 일으켜 세우고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하였다. 최제안은 죽어서 절을 호위하는 신이 되었는데, 영험과 이적이 자주 드러났다고 한다.

 

지금은 다시 절터와 몇몇 유적만 남아 있으니 한때는 경주 남산 일대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는 천룡사의 처지 앞에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고위봉에서 내려다본 천룡사지 일대. 삼국유사에서 신이한 절터라 할 만하다

 

천룡사지는 삼국유사에서도 그 터가 신이하다고 할 정도로 묘한 입지를 가진 사찰터이다.

남산이 금오봉과 고위봉의 두 큰 봉우리로 이어져 있는데, 천룡사지는 남쪽 고위봉 바로 아래 비교적 넓은 옴폭한 분지 지형에 포근하게 자리한 사찰터이다. 이 터의 아래위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이 평평한 분지가 더욱 도드라진다.

 

고위봉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희한한 산중 분지 지형이 제대로 보이는데, 터에서 고위봉을 올려다보면 멋진 기암군이 봉우리를 감싸고 있어 눈이 즐겁다.

한눈에 명당자리라는 게 느껴진다.

 

 

옛날 이 절의 시주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천녀와 용녀라 하였다. 부모는 두 딸을 위해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을 따 천룡사라 하였다.”

 

위와 같이 사찰 이름의 유래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하늘이 확 트인 지형적 조건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이 사찰을 지키고 있는 법승 스님의 말을 빌리자면, 시내에는 황룡(황룡사), 남산에는 천룡(천룡사)이라 하여 두 마리의 용이 경주를 지키고 있다 할 정도로 큰 절이었다 한다.

 

천룡사지 삼층석탑

 

이미 1989~1990년에 동국대에서 발굴 조사하였고, 1996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금당지를 다시 발굴 조사했는데, 지금 터를 돌아보면 한 번 더 광범위한 발굴이 필요할 것 같다. 생각보다 터가 더 넓어 보인다.

 

틈수골 계곡길

 

천룡사지로 가는 길이 두 개 있는데, 용장골에서 언덕 넘어가는 길과 틈수골에서 올라가는 길이다.

나는 틈수골 길을 애용한다.

틈수골에서는 다시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과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 있는데, 약간 좁고 가파르긴 해도 계곡길이 더 보기 좋고 운치가 있어 보통 이 길로 오른다.

 

틈수골 길에 잠깐 나타나는 대나무숲

 

틈수골은 여름 한 철에 물이 좀 흐르고 다른 계절에는 거의 물이 말라버리는 계곡이다. 하류권에는 물이 졸졸졸 흐르지만, 상류로 오르다보면 어느새 물이 없다.

그래도 과거에는 물이 제법 흘렀던 듯 흔적만은 뚜렷하다.

 

틈수골 입구에서 천룡사지까지는 약 1.7km.

처음에는 평탄한 계곡길을 따르다 이내 경사가 급해진다. 산행이 익숙하지 않으면 제법 힘들 것 같다.

 

등산객들이 식사도 하고 막걸리도 마시는 집, 녹원정사

 

경사진 길은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평탄한 길로 바뀐다. 산중 분지로 들어선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이 넓은 터에는 옛 천룡사의 흔적들과 더불어 고추와 배추 등 사람들이 여러 작물을 재배하는 밭농사 터, 등산 손님들을 주로 상대하는 두 개의 막걸리 집, 근래에 다시 복구하고 있는 천룡사 절집들이 있다.

 

 

천룡사 옛터의 중심에 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높이 7m. 보물 제 1188.

본래는 무너져서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1991년에 부재를 모아 다시 세웠다.

 

불완전한 부분들은 새로 만들어 보완하였는데, 기단부와 상륜부의 돌 색깔이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상륜부는 통째로 다시 만들어 올려놓았다는 게 티가 확 난다.

아래쪽 탑신부와 색채가 달라 어색해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아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괜찮다.

 

새로 만들어 올린 상륜부, 아래 부분들과 색채가 다르다

 

그래도 이 탑은 경주 남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위봉을 병풍처럼 이고 있는 탑이고, 가파른 고위봉 사면과 가파른 틈수골 사면 사이의 넓은 분지를 저 홀로 차지하고 있는 듯한 시원스런 모양의 탑이다.

 

한 자리에 모아 놓은 석조 유구들

 

탑 옆에는 발굴 조사하면서 나온 석조 유구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았다. 천룡사 전각들의 기둥을 받쳤을 받침돌의 흔적들이 반갑다.

 

한편, 천룡사 요사채 앞에는 목 잘린 귀부가 덩그러니 놓여 있어 안타깝다. 온전한 모습이었다면 문화재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세부 수법이 괜찮아 보인다.

 

목 잘린 채 남아 있는 귀부

 

물을 받아쓰는 돌그릇, 석조는 탑 동쪽 한 구석에 놓여 있어 발견하기도 어렵다. 그 옆에는 밭이 있는데, 이 밭 너머로 멀리 맷돌이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게 흩어진 이 석조 유물들을 찾아 보면 본래 천룡사의 영역이 상당히 넓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터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석조

 

천룡사지에는 과거 인가 20여 채 정도가 있어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마을의 흔적인 듯 감나무들이 곳곳에 많다)

여기에 천룡사가 다시 들어서 장기적인 복원을 하는 과정에서 사찰이 인가를 사들이면서 부지를 확보하였다.

 

주지였던 도문스님이 천룡사를 다시 세우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노력은 법승 스님에 이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천룡사지 여기저기에 서 있는 감나무, 아무도 따지 않아 감이 매달려 있다가 그냥 떨어진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천룡사지에 오르면 가슴이 시원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명당자리라서 그런가 싶기도 한데, 뭔가 인연이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 절의 신도처럼 되어 있다.

 

탑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나를 눈여겨본 천룡사의 법승 스님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몸이 크고 얼굴이 부리부리한 호감형의 스님이었다.

 

천룡사를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스님으로서 천룡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직접 안내도 하고 여러 가지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복원 중인 천룡사. 근래에 남산선당이라는 전각을 지었다

 

덕분에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도 주워듣게 되었다.

작년, 20169월의 경주 지진 당시, 실제 진앙지인 인근의 내남면에서 지진이 났을 때, 삼층석탑이 많이 흔들려 훼손되었다고 한다. 언론과 매스컴에서는 유명한 첨성대의 균열에만 집중했는데, 사실 이 탑은 훼손이 심했는데도 별로 유명하지 않아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그래서 다시 탑을 해체하고 복원하였는데, 이 때 탑신부의 사리공에 사리를 구해 와 넣었다고 한다.

 

전화위복이 됐군요.”

그런 셈이지요. 허허~”

 

사찰의 복원에는 꽤 오랜 세월이 걸릴 듯한데, 사람 좋아 보이는 법승 스님의 얼굴이나 말투에는 초조하거나 급한 티가 전혀 없다.

뭐 언젠가는 부처님이 도와 주셔서 다 되겠지요 라는 표정이었다.

 

언제든지 오셔서 주무시고 원고 작업도 하십시오. 하루 이틀 전에 미리 연락만 주시면 방을 비워놓겠습니다... 앞으로 천룡사 많이 알려 주십시오.”

 

받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천룡사, 천룡사지와의 인연은 그렇게 계속될 것 같다.

 

 

 

주소 및 기타 정보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백운대길 101-388

연락처: 천룡사 054-748-2901

용장3리 틈수골 입구에서 1.7km 걸어 올라간다.

차를 갖고 갈 경우 약 800m 지점까지 차를 끌고 올라갈 수 있다. 계곡 안쪽에 차를 댈 수 있는 공간들이 몇 군데 있다.

SUV 차량의 경우 능선길 따라 천룡사 앞까지도 올라갈 수 있으나, 안 그러는 게 좋겠다.

 

가는 길

자가용

경부고속도로 경주IC서라벌로를 따라 직진하다가 35번 국도로 우회전, 형산강을 따라가다 용장교를 건넌 뒤 인천교 사거리에서 좌회전, 인천교를 건너 남산길을 따른다. 내남 방향으로 약 1km 진행하면 용장3리인데, 이곳 좌측 산길이 틈수골이다.

 

대중교통

경주 시내 주요 지점(경주역 앞, 시외버스터미널, 중앙시장 등)에서 500번대 시내버스(500, 503, 505, 506, 508 )를 이용, 용장3리 앞에서 내리면 틈수골 입구이다. 여기서 걸어 올라간다.

 

맛집

틈수골 입구에는 식당이 없다.

인근의 내남면, 용장골 입구나 삼릉골 입구 쪽에서 식사한다.

 

용장암소숯불 (소금구이, 육회, 054-745-6009)

수리뫼 (한정식, 054-748-2507, www.surime.kr)

남정부일기사식당 (짬뽕, 054-745-9729)

금오산손칼국수 (우리밀손칼국수, 054-745-8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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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875-2 | 천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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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空空(공공) 2017.11.22 09:27 신고

    삼국 유사..어릴때 달달 외웠었는데 지금은 가물가물합니다
    다시 세우고 보완한것도 보물이 되는군요^^

    • 자유여행인 2017.11.22 11:57 신고

      네. 원형을 간직하고 있거나 원형대로 만들면 문화재로 인정받습니다.
      서울 숭례문은 지금도 국보 1호이지요. ^^

  2. @파란연필@ 2017.11.22 11:02 신고

    석탑과 함께 주변의 산세가 참 멋진 곳이네요... 잘보구 갑니다~

  3. 『방쌤』 2017.11.22 13:44 신고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을 보니
    왜 신이한 절터라고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 자유여행인 2017.11.22 19:34 신고

      경주 일대에 이런 지형이 없습니다.
      옛사찰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옛사람들의 눈이 놀라울 따름이지요.

 

# 복원된 1,300년 전 경주 월정교의 야경을 보다

 

달이 뜬 월정교. 마치 종이를 접어놓은 듯, 아래위가 똑같은 모습이다.  

 

20171031일부터 113일까지 제 14차 세계유산 도시기구 경주 총회가 열리고 있는데, 이 기간 동안 복원 중인 월정교를 개방하였다.

 

오전 9~오후 5시까지 임시로 개방하고 있는 월정교는 사실상 복원 공사가 거의 끝나 조만간 정식 개방을 할 것 같다.

 

 

최근 몇 년간 월정교 공사가 진행 중일 때 언제 다 만들어지나 꽤 기다렸다.

교촌 한옥마을에 갈 때마다, 경주국립박물관에 갈 때마다 지나면서 공사 중인 현장을 슬쩍 보곤 했는데, 이제 임시로라도 오픈한다니 안 가 볼 수 없다.

 

 

국제 행사 때문에 좀 서둘렀다는 느낌인데, 일단 건물 자체는 다 되었지만, 주변 정리가 덜 되고 편의시설이 들어서지 않아 썰렁하긴 하다. 정리 공사가 더 필요하겠다.

 

 

월정교는 신라 때 경주 시내에서 남촌을 건너는 두 개의 다리, 일정교(춘양교), 월정교 중 월성 서쪽에 위치했던 다리이다.

 

 

월정교는 삼국사기경덕왕 19(760)조에 궁궐의 남쪽 문천 위에 춘양(春陽), 월정(月淨)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에 전하는 다리로, 후에 춘양교는 일정교(日精橋), 월정교는 한자가 바뀐 월정교(月精橋)로 이름이 바뀌었다.

, 두 다리가 각각 해와 달의 정령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바뀌어 강한 상징성을 띠게 된 셈이다.

 

 

두 개의 다리 중 이제 월정교가 복원되었다.

본래 남아 있던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되어 교각 위에 목재 누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바로 이 누각이 달린 다리가 복원된 것이다.

다리의 길이는 60.57m로 추정.

 

 

그러다보니 복원 공사를 할 때부터 다리의 모습이 상당히 화려할 것으로 추측되었고, 나도 완성된 모습이 어떨까 궁금해 했다.

 

신라 때 최고의 로맨스로 남은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남은 월정교.

(사실 원효는 7세기 때 사람인데, 다리를 만든 것은 8세기 때이므로 역사적 사실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전설이라고 표현했다. 보통 원효와 요석공주 스토리의 현장은 월정교 건설 이전에 있었던 유교라고 불리는 또 다른 과거의 다리로 추정한다)

 

 

수많은 사람들과 물류가 시내로, 서라벌 외곽으로 이동했던 번화하고 번잡했을 다리.

궁궐이었던 월성 양쪽으로 춘양교와 월정교가 남천을 가로지르며 밤낮으로 화려했을 신라 때의 그 현장을 상상해 본다.

무려 1,300년 전에 만들어진 다리이다.

 

 

더구나 월정교는 달의 정기를 상징하는데, 마침 달이 뜬 밤이다.

남천에 어린 월정교의 모습과 달이 어울려 도대체 어디까지가 실물이고 어디까지가 물에 비친 그림자인지 헷갈린다.

신라 때도 그랬을까.

 

 

교촌 마을 주차장이나 남천 가에 차를 세우고 약 150m 거리로 월정교가 보이는 돌다리에서 보는 야경이 전체를 다 볼 수 있어 좋고, 사진 촬영에도 좋다.

 

흔히 보기 어려운 누각 달린 다리가 복원되었으니, 그 문화재적 가치나 충실한 복원 여부를 떠나 하나의 명소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특히, 당분간 정리 작업 때문에 개방하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건물을 조망하거나 야경을 감상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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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교동 274 | 월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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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空空(공공) 2017.11.03 11:13 신고

    지난 8월에 갔을때도 한창 공사중이었는데 이제 다 되아 가는군요^^

 

# 괘릉 (원성왕릉) - 볼거리 많고 분위기 좋은 화려한 왕릉

 

 

통일신라 선덕왕 때 진골 귀족이자 이찬이었던 김경신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머리에 쓴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썼는데, 갑자기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는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그는 점쟁이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벼슬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들었다는 것은 칼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갔다는 것은 감옥에 갈 조짐입니다.”

그는 이 말에 충격을 받고 근심하여 병을 핑계로 집안에 근신하였다.

 

괘릉(원성왕릉) 진입로

 

그런데 당시 아찬 여삼이란 사람이 굳이 찾아와 해몽을 다시 해 주었는데,

이는 정말 상서로운 꿈입니다. 복두를 벗은 것은 더 높은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흰 갓을 쓴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입니다. 열두 줄 가야금은 12대 후손까지 왕위가 이어질 조짐입니다.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조짐입니다.”

라고 하였다. 사실상 왕이 된다는 말.

덧붙여 한 가지를 당부하였다.

 

북천신(北川神)에게 몰래 제사를 드리십시오.”

그는 기분이 풀어지면서 그 말에 따라 제사를 드렸다.

 

괘릉 문인석과 무인석

 

얼마 후 선덕왕이 자식 없이 사망하였다.

당시 귀족들은 회의를 통해 서열 1위인 김주원을 왕으로 삼고자 그를 궁궐로 맞이하려 하였다. 김주원의 집은 북천 너머에 있었는데, 이때 갑자기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서열 2김경신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원성왕이다.

 

고려 때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꿈보다 해몽이다, 라는 말은 여기에 해당하는 말인 듯하다.

꿈의 내용보다 인간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

 

 

김경신, 원성왕이 된 그의 무덤을 흔히 괘릉이라 한다.

 

괘릉은 신라 제 38대 원성왕(785-798)의 능으, 신라 모든 왕들의 무덤 중에서 가장 볼거리 많고 화려하여 가볼 만한 곳이다.

게다가 통일신라 때의 능묘제도를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어 왕릉 답사지로도 첫손에 꼽히는 곳이다.

괘릉이라는 이름은 원래 이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왕의 유해를 연못 위에 걸어서 장사 지냈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본래 이곳에는 곡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원성왕의 능을 찾을 때 절 자리를 뺏는 것은 좋지 못하다.”라는 일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왕들이 훌륭한 곳에 자리 잡으면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라는 주장에 밀려 이곳에 왕릉이 만들어지고 곡사는 지금의 숭복사터로 옮겨졌다.

 

 

괘릉에 들어서면 정면 중앙의 왕릉을 중심으로 잔디밭이 길게 이어지고, 양 옆으로 문인상 1쌍과 무인상 1, 돌사자 상 2쌍이 약 20m 간격으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봉분은 밑 둘레 70m, 높이 7.7m이며, 봉분 밑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을 둘렀고, 그 주위로 수십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둘렀다.

십이지신상은 지금도 꿈틀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은 조각 수법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명하고 주목받는 것은 무인석이다.

한국 사람의 얼굴이 아닌, 명백한 서역인(이슬람인)의 모습을 한 무인석은 그네들의 키 크고 수염 기른 당당한 모습이 신라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눈이 깊숙하고 코가 우뚝하며 곱슬머리인 무인상은 신라가 무역이 발달하여 중국은 물론 서역과도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하필 무인상의 모습이라는 것은 그들이 키가 큰데다 힘도 세 보여서 그랬던 모양이다.

팔 근육까지 표현해냈다. 하여간 여전히 흥미로운 상이다.

 

웃고 있는 돌사자상

 

네 마리의 사자상도 자세히 보아줄 만하다. 두 마리씩 마주 보고 있는 사자상은 각기 동서남북을 지키고 있는데, 자기가 지키고 있는 방위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사적 제 26호이다.

 

문인석

 

무덤의 주인공 원성왕은 당대의 진골 귀족으로, 서열이 앞서는 김주원과 왕위 계승을 다투다가 전 왕인 선덕왕이 죽은 뒤 북천의 물이 넘쳐 김주원이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때 서둘러 궁궐에 들어가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김경신이 즉위하자 곧 비가 그쳐서 귀족들이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는 김경신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권력투쟁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밀린 김주원은 강릉으로 옮겨 가서 살게 되며, 후에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된다. 그 후 신라 말기의 왕들은 이 원성왕의 직계들이 계승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괘릉은 지금까지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고, 여전히 분위기가 좋다.

 

 

하지만 알고 보면, 원성왕의 무덤이라는 증거는 없다. 지금까지 추정으로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하여간 아침이나 저녁 무렵 무인상과 사자상에 그림자가 어려 상의 윤곽이 뚜렷해질 때 가보면 좋다. 조각이 더 도드라져 입체적으로 보인다.

 

 

추천 여행 코스(당일)

1코스: 괘릉(1시간)5영지(40)10숭복사터(40)15원원사터(40)

2코스: 괘릉(1시간)5구정동 방형분(30)15불국사(1시간 30)15→→석굴암(1시간)

 

주소 및 기타 정보

주소: 경주시 외동읍 신계입실길 139, 구 주소 외동읍 괘릉리 산17

입장료 없음.

주차는 50대 이상 가능, 주차료 없음

서역인의 무인상과 웃고 있는 돌사자상이 이 무덤의 포인트이다. 꼭 확인하자.

 

 

가는 길

자가용

경부고속도로 경주IC직진 진행하다가 인왕동 사거리에서 우회전7번 국도 울산 방향을 따라 내려가면 불국사 입구를 지나 약 3km 진행, 좌측에 안내판이 있고 시멘트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500m 들어가면 왼쪽에 있다.

 

대중교통

경주역과 시외버스터미널, 고속터미널 앞 등 경주 시내 주요 지점에서 600, 605, 607, 609 번 등 버스를 이용, 괘릉 입구에서 하차하여 10분 정도 걸어간다. 600번 버스가 자주 다닌다.

 

맛집

괘릉 가는 국도변과 불국사 방면에 먹을 만한 집들이 제법 있다.

 

석거돈 (낙지+돼지두루치기, 낙지볶음, 054-746-6308)

고색창연 (떡갈비정식, 054-748-0952)

유수정 (쌈밥, 054-771-0786)

고래등 한정식 (보리굴비정식, 054-741-4667)

마당발 쭈꾸미 (주꾸미 철판볶음, 떡갈비, 054-748-9977)

 

숙박

숙박은 괘릉 주변과 불국사 일대의 숙박시설을 이용한다. 호텔, 펜션들이 많다.

 

경주 코오롱호텔 (054-746-9001, www.kolonhotel.co.kr)

보보뚜펜션 (반려견펜션, 010-6583-3487, http://blog.naver.com/bobotu669)

도도펜션 (010-2523-5800, www.dodopension.kr)

씨엘블루펜션 (010-9638-8787, www.cielbleups.kr)

탑클래스펜션 (054-741-9988, http://topclass1.kr/)

솔바람사이길펜션 (054-742-4111, www.solbaramgil.co.kr)

허브캐슬펜션 (054-742-0890, www.herbcast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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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 | 경주원성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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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도나그네 2017.08.22 19:35 신고

    경주 외동에 이렇게 잘 정비되고 잘 보전된 사적지가
    있었군요..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기회가 되면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구요..
    좋은곳 소개 잘보고 갑니다..

  2. 『방쌤』 2017.08.23 15:14 신고

    지나다 잠시 들른다는 생각으로 갔던 곳인데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던 기억이 납니다.
    차들이 많지 않아서 주차 공간도 넉넉하고 참 관리가 잘 되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곳입니다.^^

    • 자유여행인 2017.08.23 16:13 신고

      아마 원성왕의 후손들이 계속 왕이 되어서 관리가 잘 되었던 데다, 지금까지 경주김씨들의 주류로 내려오다보니 신경을 쓴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이 여기까지 잘 오지 않아서 대개 조용하고 호젓하지요. ^^

  3. 루비™ 2017.08.29 10:28 신고

    괘릉은 조용해서 제가 자주 가는 곳이에요.
    소나무숲 그늘에 앉아 있으면 너무 고즈녁한게 좋아요.

    • 자유여행인 2017.09.01 00:28 신고

      그러시군요.
      좀 알려진 왕릉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지 않아 호젓하고 좋은 듯합니다.

  4. 앙즈 2017.10.20 23:25

    내일 경주로 여행을 가는데 어디를 가면 좋을까 검색하던중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자세하면서도 재미난 글 잘 읽었어요~ 괘릉 꼭 둘러보고싶어졌습니다.

    • 자유여행인 2017.10.21 21:07 신고

      고맙습니다. 요즘 첨성대 옆 핑크뮬리 군락이 핫한 곳이니 거기도 한번 들러보십시오~

# 경주 서출지와 카페 서오 - 

사금갑의 전설이 서린 여름 연못과 운치 있는 한옥 브런치 카페

 


산 자체가 야외 박물관이라 부를 정도로 온갖 문화재와 유적이 몰려 있는 경주 남산 아래 동쪽 기슭 조용한 분위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연못이 서출지이다.

 

풍천 임씨 소유인 이요당이라는 제법 오래된 정자 앞에 있는 연못인데, 1664년 임적이 세웠다. 지금도 이 일대는 풍천 임씨의 집성촌으로 남아 있다.

정자 앞 좁은 마당에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듯한 연꽃 대좌가 1개 놓여 있다. 정자에는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다. 사적 제138.

서출지(書出池)라는 이름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전한다.


여름 서출지 (아래 위)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소지마립간 10(488) 때였다.

왕이 천천정에 이르렀을 때 쥐와 까마귀가 나타나 울더니 쥐가 말하기를, “까마귀가 가는 곳을 살피라하였다. 사람을 시켜 쫓았더니 피촌이라는 동네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까마귀가 간 곳을 잊어버렸다.

이 때 한 노인이 연못 속에서 나와 봉투를 주면서 말하기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봉투를 받아든 왕은 어차피 죽는 거라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때 한 사람은 바로 왕을 가리키는 말이옵니다. 뜯어보십시오.” 라는 일관(日官)의 말을 듣고 결국 봉투를 뜯으니, 거문고 갑을 쏘아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궁궐에 돌아온 왕이 거문고 갑을 쏘니 그 속에 궁녀와 승려가 들어가 있었다. 이들은 서로 사통하여 왕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한다. 두 사람은 곧 사형을 당했다. 이후로 노인이 나타나 서찰을 준 연못을 서출지(書出池, 글이 나온 연못)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아직 불교가 공인되지 못하던 시절, 신라에서 이른바 종교 권력을 놓고 불교계와, 일관으로 대표되는 전통 종교 간에 갈등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전설이다.

신라에서 불교가 정착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이 전설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과 현실을 반영하는 전설로 보인다.

결국 소지왕 사후 지증왕을 거쳐 법흥왕 대에 불교가 공인되고 왕실 보호 하에 급속하게 발전하는 걸 보면 불교는 오랜 탄압과 어려움 끝에 성공하는 종교로 자리 잡게 됨을 알 수 있다.


 

서출지 자체는 봄~가을에 걸쳐 조용한 분위기에서 연못 풍경을 즐기기 좋다. 연못을 가볍게 산책하듯이 도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이다. 한 바퀴를 모두 도는 데에도 불과 20분도 안 걸릴 정도로 작지만, 호젓한 풍경은 일품이다.

특히, 한여름에는 배롱나무(목백일홍)들에 붉은 꽃이 피고, 연못의 연꽃들이 피어올라 다양한 색채의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소나무들이 우거진 사이사이로 나무 벤치가 있어 잠시 쉬면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 더욱 좋다.


서출지 연꽃 

 

일설에는 이 서출지가 삼국유사의 서출지가 아니고, 본래는 마을 안쪽의 양피지가 서출지라는 설이 있다. 조용하고 호젓한 이 마을 안쪽 양피지라는 연못에 가보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서출지라는 이름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라 이곳 서출지가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요당이라는 건축물 때문에 포인트가 되는 데다 여름날 풍경이 아름다워 특별한 증거가 없다면 이곳을 서출지라고 그대로 인정해도 될 듯하다.


 

서출지 뒤편, 남산 산줄기 쪽에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풍천 임씨들이 모여 사는 동네인데, 다른 대도시에 나가 사는 경우가 많아 빈집들이 많다고 한다.

 

마을에서 이 서출지를 바라보는 지점에 서오 라는 한옥 브런치 카페가 있다.

입구 마당에 푸른 잔디가 깔려 있고, 내부에 들어가면 정면으로 서출지 일대를 내려다보는 창이 넓어 눈맛이 시원하며, 옆문으로 테라스에 나갈 수 있다. 올해(2017) 4월에 처음 차렸다고 한다.


카페 서오 

 

카페 사장 이지영씨는 풍천 임씨인 남편의 고향 마을에서 한옥 카페를 차렸는데, 마을의 모든 건물은 기와지붕을 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아예 목조로 운치 있게 카페를 만들었다고 한다. - 그러고 보니 마을 모든 집들의 지붕에 기와를 얹었거나 기와집 모양이다. -

 

서오라는 이름은 이 동네에 사셨던 시어머니 집의 택호(당호, 집에 붙인 이름)였다고 한다. 분위기 있는 이름이다.


 

이지영 사장은 인상이 좋고 기본적인 붙임성이 있는 데다 카페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친절하다. 특별히 카페 자랑할 거 없냐고 묻자,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온다.

로즈마리를 넣어 드리는 시원한 물도 좋아요.”


서오 샌드위치 

 

내부 공간이 비교적 넓은데, 테이블이 많지는 않아 전체적으로 쾌적하다.

커피류와 쥬스, 에이드류, 팥빙수 등을 팔고 있으며, 대체로 4,000~6,000원대 가격이다.

브런치는 직접 소스를 만들어서 예쁘게 제공한다. 카프레제 파니니, 베지터블 파니니, 서오 샌드위치 8500~9,000원대 가격.

나는 샌드위치를 먹었다.


서출지 오가는 길에 휴식처로 들러 가기 좋은 집이다. 

 


여행 포인트: ~가을에 찾으면 좋다. 7~8월에는 날씨가 덥지만, 연꽃과 배롱나무의 백일홍을 볼 수 있어 좋다. 이때쯤엔 야경도 좋다. 8월이 절정이다. 가족여행, 커플여행, 소규모 단체의 가벼운 답사 코스로 괜찮다.

 

추천 여행 코스(당일)

1코스: 서출지(40)5남산동 3층석탑(20)5염불사지(20)도보 1시간 30칠불암(30)

2코스: 서출지(40)10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1시간)10국립경주박물관(2시간)2동궁과 월지(안압지, 1시간)

 



주소 및 기타 정보

주소: 경북 경주시 남산117

입장료 없음.

주차는 통일전 주차장에 세운다. 혹은 서출지 주변에 한두 대씩 댈 수 있는 곳들도 있다. 100대 이상 주차 가능

연못을 전망하는 이요당은 개인 소유라 원칙적으로 출입이 안 된다.

 

가는 길

자가용

경부고속도로 경주IC직진 진행하다가 인왕동 사거리에서 우회전7번 국도 울산 방향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왕사터 앞에서 우회전, 화랑교를 넘어가거나, 7번 국도로 조금 더 나가 동방역을 지난 후 우회전해 통일전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통일전 옆에 서출지가 있다.

 

대중교통

경주역과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11번 버스(20분 간격 운행)를 이용, 통일전 주차장 앞에서 하차한다. (10번 버스의 경우 코스는 같지만, 보문단지와 불국사를 거쳐 돌아오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왠만하면 타지 않는다)

 

 

맛집

남산동 일대 구석구석에 음식점들이 하나둘씩 흩어져 있다.

이들 중 여기당(054-743-2752)은 집 이름부터 재미있다. 메뉴는 단 두 가지. 시래기밥과 시래기전. 모두 보기에도 좋고 맛도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깔끔하고 좋다. 오전 1130분에 오픈하여 오후 2시에 마감이지만, 재료가 다 떨어지면 그 즉시 마감한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맛보기도 힘든 집이당(?).


여기당 시래기밥 


그 외 용강국밥 통일점(국밥, 숯불주꾸미볶음, 070-7371-8209), 한옥집에서 먹는 카레가 색다른 아라키(한우 카레라이스, 070-4212-6959)

 

숙박

남산동 일대에 숙박 시설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칠불암한옥펜션 (단체, 가족용, 054-741-2828, www.chilburampension.com)

한옥민박 혜리원 (010-4752-8445, http://blog.naver.com/nhansol2)

한옥 민박 운정루 (010-8411-9794, https://unjeongru.modoo.at/)

 

여의치 않으면 불국사 앞이나 시내가 모두 가까우니 이동하여 숙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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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남산동 973 | 서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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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기림사  –  명품 계곡을 안고 있는 호젓한 사찰

 

기림사 옆 계곡 풍경


외지인들은 감은사, 대왕암에 가고, 우리 경주 사람은 기림사로 오는 기라.”

기림사에서 만난 60대 할아버지 내외의 말이다.

 

  경주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경주를 여행하는 여행객들은 그리 잘 모르는 사찰이 기림사이다. 꽤 큰 사찰이고 분위기도 있으며, 역사도 깊은 곳이지만, 신라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적은 데다 경주의 중심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 유명 관광지로 소문나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보물로 지정된 문화유산만 4개가 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유적지이다. 게다가 기림사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개울과 숲 풍경은 명품이라 해도 괜찮을 정도로 그윽하고 분위기가 있다. 내가 기림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문화유산보다 이 분위기와 풍경 때문이다.

 

  기림이라는 이름은 석가모니가 제자를 가르치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원정사의 숲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언제 창건된 사찰인지 불분명하지만, 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682년 감은사 앞바다까지 왔던 신문왕이 왕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되어 있어 이미 그 이전부터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림사는 옛 기림사 경내와 새로 신축한 기림사 경내로 나누어져 있는데, 옛 기림사 안마당에는 17세기에 만든 웅장한 대적광전(보물 제833), 18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응진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 중 제법 규모 있는 진남루는 임진왜란 때의 승병 활동과 관련이 있는 건물이다. , 옛 기림사 경내의 안마당에는 신라 말기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3층 석탑이 있다. 옛 사찰 경내는 석탑과 색깔 없는 목조 건물들, 보리수나무 등이 의외로 고즈넉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갖고 있어 좋다. 편안한 마음으로 거닐어보기에 이만한 곳도 드물다.


 

  한편 기림사 유물전시관에는 건칠보살상(보물 제415)이 있다. 종이로 만들어 옻칠을 한 특이한 보살상으로, 오른쪽 다리를 밑으로 늘어뜨린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이런 모양을 유희좌라고 한다.)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 속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에 베껴 쓴 불경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도 같이 전시하고 있다.

 

  기림사 진입로 옆으로는 조용한 계곡이 있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아 대체로 조용하며, 길 따라 300m 쯤 가면 감로암이 있고, 계곡을 따라 500m 쯤 가면 용두연이라는 곳이 있어 취사나 야영에 적당하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 일대의 풍경은 명품이라 할 만하다


기림사 진입로 

 

답사 타이밍: , 가을의 호젓한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특히, 풀과 나무들이 푸른빛을 내는 5월과 9월이 가장 분위기 있다. 번잡함을 싫어하는 가족 여행에 좋지만, 남녀의 데이트 겸 답사지로도 괜찮다.

 

# 답사 정보

주소: 경주시 양북면 기림로 437-17

문의: 기림사 054-744-2292, www.kirimsa.net

기타: 주차장이 넓어 주차 공간은 넉넉하다. 200대 이상 주차 가능. 기림사 오가는 길에 우측의 계곡 옆 숲과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운치 있다.

기림사에서도 템플 스테이를 운영한다. 봄 녹차밭 체험과 가을 연밭체험이 괜찮다. (템플 스테이 문의는 위 문의처로 하면 된다)


 

가는 길

승용차로는 경부고속도로 경주IC경주 시내4번 국도 감포 방향추령터널안동삼거리에서 좌회전, 5km 진행하면 왼쪽으로 기림사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혹은 울산-포항고속도로 동경주IC에서 나와 양북4번 국도 경주 방향안동삼거리에서 우회전, 5km 진행하면 왼쪽으로 기림사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대중교통으로는 경주 시외버스터미널 혹은 경주역 앞에서 150번 버스(40~1시간 간격 운행), 100번 버스(20~30분 간격 운행) 이용, 양북면 소재지(어일리)에서 하차 후, 130번 버스(하루 4회 운행)를 이용하여 기림사 입구에서 하차한다. 어일리에서 택시를 이용해도 되지만, 1만원 이상 각오한다.

 

맛집

기림사 일대에서 추천할 곳은 없다.

동해안 방면이 가까우니 대왕암 일대로 가서 회를 먹는 것이 좋다. 생선회를 맛볼 만한 곳으로는 감포항 일대와 대본항 일대를 들 수 있다.

 

대왕암 북쪽 건너편에 바로 대본항이 있다. 대본항 일대의 횟집들은 대개 바다를 바라보며 길게 이어져 있어 전망이 좋으며 전체적으로 비용도 크게 비싸지 않다.

직접 고깃배를 소유하고 바다에 나가 잡아온 고기를 내는 집들이 많아 회들이 싱싱하고 쫄깃하다. 수성횟집(054-771-8855), 대동횟집(054-771-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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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7 | 기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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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신 묘  - 신라를 대표하는 명장의 당당한 무덤

 


   신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역사 인물 하면 김유신을 떠올릴 것이다. 요즘이야 김유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져 예전 같은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신라 삼국통일의 명장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1400년 전의 인물 치고는 역사 기록도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어 그의 일생이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당시 신라 지배층 내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그가 어떻게 비상한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발휘하며 최고 권력에 근접하였고 결국 영광스럽게 죽었는가는 오랫동안 정치인, 경제인들에게 하나의 텍스트로 남아 있었다.


 

   경주 시내 외곽에 있는 수많은 무덤들 중 왕릉이 아니면서도 왕릉 대접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있는 무덤이 김유신 묘이다. 예전 드라마 선덕여왕의 방영 이후 이 조용한 무덤은 사람들의 방문이 좀 늘면서 경주의 명소 중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 좋은 울창한 소나무숲 안에 들어앉은 묘는 다른 무덤들에 비해 좀 더 높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으로 가는 길이 산속이지만 비교적 평탄하고 길이 잘 닦여 있어 불편함이 없다. 무덤에 이르면 전체적인 분위기도 괜찮다. 왕이 아니지만 무덤의 전체적인 모양새가 대단히 화려하다. 지름이 30m에 달하는 원형분이며 둘레에는 호석과 돌 난간을 둘렀다. 사적 제21호이다.


 

   김유신 묘에는 12지신상이 둘러져 있는데, 갑옷을 입지 않고 평상복 차림에 무기를 들고 몸의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12지신상으로 잘 조성된 무덤은 삼국통일 이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만들어지므로, 이 무덤을 김유신의 것이 아니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그가 뒤에 흥무대왕으로 봉해졌을 때, 혹은 779년 혜공왕이 김유신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새로 만들어 배치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이 무덤이 김유신 묘라는 물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김해 김씨 문중에서 인정하고 있으니 그렇게 봐 주는 게 맞을 것 같다.


 

   김유신(595-673)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으로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명은 아버지 숙흘종이 금관가야계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가출하여 만노군 태수로 부임해가는 김서현을 따라가 김유신을 낳았다고 한다.

 

   이처럼 신라의 보수적인 구귀족들이 가야계를 배척하는 분위기에서 김유신은 역시 당시 왕족들 중에서 비주류였던 김춘추와 손을 잡고 정치적 실력을 쌓았다. 자기 동생을 김춘추와 혼인시킨 이후 여러 번의 위기 상황에서 끝까지 김춘추와 신의를 지켰고, 뛰어난 군사 활동으로 백제의 침략을 막아냈다.

그리고 선덕여왕 말기의 비담, 염종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실권을 장악하였고,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자신의 무력을 배경으로 김춘추를 왕위에 앉혀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그 후 백제 통합 과정에서 군대를 지휘하였고, 나이 70이 넘어서까지 전쟁터를 누비는 등 용맹을 떨쳐, 이후 신라인들에게 깊이 각인된 당대의 명장으로 남게 된다.

사망 후 한참 뒤인 흥덕왕 때(826~836)에는 흥무대왕으로 봉해졌으며,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다.

 


   오늘날 김해 김씨 문중에서는 그를 중시조로 추앙하고 있다. 시조는 김수로왕이지만, 김유신 이후 김해 김씨 1,400년 번영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숫자로 보면 현재 김해 김씨가 대한민국 인구 분포에서 9%를 차지하고 있으니-단일 본관 중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숫자와 비율-, 대한민국 국민들 10명 중 거의 한 명은 김해 김씨라는 얘기이다. 만주에서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도 김해 김씨의 후손이라는 전설도 있다.

 

이래저래 신라 역사는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여행 포인트: 무덤으로 가는 숲길이 좋아 봄, 가을에 가보면 좋다. 길이 평탄하므로 아이와 어르신을 모시고 가는 여행, 가족여행, 단란한 소규모 단체 여행에 적합하다.

 

추천 여행 코스(당일)

1코스: 김유신 묘(40)10태종무열왕릉(40)2김인문 묘(30)10오릉(2시간)10·국립경주박물관(2시간)

2코스: 김유신 묘(40)10노동동, 노서동 고분군(1시간)5대릉원(1시간)5첨성대(30)5안압지(1시간)



연락처 및 기타 정보 

주소: 경북 경주시 충효 244-7 

경주 사적공원 관리사무소 054-771-7102

주차장은 약 30대 정도 수용 가능

입장료는 어른 1,000, 청소년 600, 어린이 400원 (2017년 3월 기준)

 

가는 길

자가용

경부고속도로 경주IC나정교를 건너 나오는 사거리에서 좌회전, 오릉을 지나 고속터미널로 간다. 고속터미널 앞 서천교를 건너 우측 송화산 쪽으로 1Km 진행하면 좌측으로 김유신 묘 입구에 닿는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주차장이다.

 

대중교통

김유신 묘에 이르는 버스편은 없다. 고속터미널 쪽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가거나 택시를 이용한다.

고속터미널 앞 여러 자전거 대여점 혹은 스쿠터 대여점에서 자전거(스쿠터)를 빌려 타고 다녀도 좋다.

경주까지는 서울 강남고속터미널(1588-6900, www.exterminal.co.kr)이나 대구의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053-743-2828)에서 경주 행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경주역 054-743-8848, 경주고속버스터미널 054-741-4000)

 

맛집

김유신 묘 앞에서는 식사할 곳이 그리 많지 않다. 경주 시내에서 식사하는 것이 좋다.

 

영양숯불갈비 (한우 숯불구이, 054-771-2627)

명동 쫄면 (쫄면, 054-743-5310)

요석궁(한정식, 054-772-3347, www.yosukgung.com)

이풍녀구로쌈밥(쌈밥, 054-749-0060)

 

숙박

이 일대에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다. 경주 시내 숙박시설들을 이용한다. 요즘 시내에 게스트하우스가 많아졌는데, 숙박할 만하다.

경주 게스트하우스 (054-745-7100, www.gjguesthouse.com)

게스트하우스 가온 (010-8025-3858, www.gaonguesthouse.com)

차차랑 게스트하우스 (010-6814-6005, www.chacharang.com)

 

게스트하우스가 불편하면 경주시외버스터미널 뒤편 골목의 모텔들을 이용한다. 상당히 많으므로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를 수 있다.

블루모아모텔 (054-772-6303)

타임모텔 (054-777-1944)

 

찜질방은 시외버스터미널 인근 시설 좋은 스파럭스(054-624-3388, http://spalux.co.kr)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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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선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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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무장사지  - 평화를 상징하는 경주 근교의 깊은 사찰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밤하늘 별처럼 깔려 있는 경주 일대에서 가장 호젓하고 조용한 유적지를 찾아가자면 무장사지를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태종 무열왕이 전쟁이 끝난 후 무기와 병장기를 깊이 감추어 두었다는 무장계곡, 그 길로 호젓한 발걸음을 옮기면 그윽하게 감추어진 절터에 닿는다.

 

  무장사지의 소중한 점은 경주 일대에서 드물게 수량이 풍부한 긴 계곡을 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많은 유물, 유적을 품고 있는 경주 남산에서는 이런 계곡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무장사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3km에 가까운 계곡길을 걸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걷기 코스가 된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은 때로 계곡을 건너면서 징검다리를 만나기도 한다. 계곡에 점점이 돌로 이어진 징검다리는 요즘에 보기 드물어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길이다.

 

  따스한 봄철, 혹은 가을날 문화유산답사와 함께 산길, 계곡길을 걷는 묘미가 있다. 그래서 봄이면 날 좋은 햇빛 아래 걷기 코스로 사람들이 찾아들고, 가을이면 계곡에 무장봉 억새와 계곡길 걷기를 즐기려는 인파가 찾아들어 혼잡을 빚기도 한다.

 

무장사지 가는길 


  『삼국유사에 의하면, 무장사는 신라 38대 원성왕의 아버지 김효양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세운 사찰이라고 한다.

  절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됐고, 지금은 산비탈 경사면에 아래 위 평평한 터만을 남기고 있다. 아래 터에는 3층석탑이 자리하고 위쪽 터에는 탑비가 복원된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다. 석탑은 보물 제126, 귀부와 이수는 보물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무장사지는 남겨진 유물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인상에 더 깊이 남는다.

 

  무장사지는 경주 보문단지에서 북쪽 작은 산길을 넘어 암곡동 왕산마을에 들어서야 만날 수 있다. 과거에는 경주 토박이도 이런 동네가 있었는지 몰랐다고 할 정도로 좁은 골짜기의 작은 분지에 왕산마을이 있다.


호젓한 무장계곡과 징검다리 

 

  마을 끝 무장사지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드라마 촬영지라는 입간판과 비교적 넓은 주차장이 있다. 하지만 무장사지에서 드라마를 촬영한 것도 아니고 이곳 주차장에서 잠시 촬영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조금 씁쓸하다.

  무장사지는 경주에서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만큼 굳이 관광객을 여기까지 끌어 모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계곡과 산행길이 좋아 봄가을이면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쉼 없이 계곡을 따라 2.5km를 간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험준하여 깎아 세운 듯하며 침침하고 깊숙하여 주위가 절로 적적하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도를 즐길 수 있는 신령스러운 곳이다.”

라고 일연 스님(1206~1289)이 표현한 길이다.

 


  무장사지는 오른쪽 계곡을 건너 50m 산길 위에 있다. 신라가 한창 전성기였던 시절에도 여기는 깊은 계곡과 산중 사찰로 남아 있었을 것 같다.

 

  무장사지의 중심은 역시 3층석탑이다. 2단으로 나누어져 있는 절터 아래쪽 단에 위치한 3층석탑은 옥개석 일부분들이 깨어져 나가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주변 풍경과 잘 어울려 인상적인 모습이다.

내가 보기에 경주 일대 수많은 절터에 위치한 탑들 중 용장사지 3층석탑, 원원사지 3층석탑과 함께 가장 깊이 있고 분위기가 있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으로 조성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이다. 하지만 주변 계곡의 물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귐, 숲속 나무들의 호젓한 어울림이 탑 주변에 일체형으로 녹아 있다. 그래서 분위기 있는 석탑이다.


 

  3층석탑 외에 무장사지에 남은 유물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이수 및 귀부이다. 비석 부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이 자리에는 복원한 비석과, 이 비석을 받친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다. 두 마리의 거북이가 비석 받침대를 등으로 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 마리는 목이 잘려 있어 처연하다.

 

  오늘날로 치면 수도의 외곽 조용한 산속에 있었을 무장사는 어떤 사찰이었을까.

그 명칭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투구(무기)가 감추어진 절이다. 불교적 색채와 의미를 담은 이름이 아니다. 이름에서 정치적, 역사적 의미가 감지된다.

  오랜 전쟁으로 뚜렷한 성취는 이루었으나, 그만큼 상처와 희생도 많았던 삼국 통일 전쟁이 끝나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이 평화는 대단히 소중한 평화였으리라.

경주에서 가깝지만 깊고 조용한 이 계곡에 갑옷과 병장기를 모두 모아 숨겨놓았다는 전설은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여행정보


가는길

자가용: 경부고속도로 경주IC~경주 시내~보문단지~경북관광공사 앞 삼거리에서 물천리 방향 북쪽 천북남로를 따라가다가 암곡 방향 우회전, 끝까지 가면 왕산마을 지나 무장사지 입구 주차장이다. 계곡길은 차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되어 있다. 가을이면 좁은 길을 따라 주로 산행을 목적으로 하는 차들이 몰리기도 한다. 휴일이라면 아침에 일찍 가는 것이 좋다.

대중교통편: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18번 암곡 행 버스(경주역과 보문단지 일대를 거쳐 간다. 8:05~20:20까지 하루 7회 운행)를 타고 종점까지 간 후 계곡을 따라 2.5km 걷는다.

 

맛집

보문단지 쪽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좋다.

낙지마실: 보문단지 입구 먹거리촌에 있다. 일대가 순두부로 유명하지만, 이 집은 낙지볶음, 낙곱새, 낙지순두부 등 다양한 낙지 요리 메뉴와 저렴한 가격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054-749-0048

고색창연: 보문단지에서 불국사 가는 길가에 있다. 저렴한 가격에 깔끔한 밑반찬과 함께 떡갈비를 내는데, 주인이 서울 출신이라 대개 서울과 수도권 사람들 입맛에 맞다.

054-748-0952

 

:주변 가볼만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