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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 이야기

장보고와 청해진 - 시대를 앞서간 벤처의 원조



# 장보고와 청해진 - 시대를 앞서간 벤처의 원조



 

(청해진이 설치된 장도 -사진 가운데 부분)



장보고, 청해진을 설치하다


서기 828, 음력 4(양력 5)의 어느 날, 신라의 왕궁.


네가 해적 소탕을 위해 상단 호위 무사를 이끌고 신라에 왔다고 들었다. 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흥덕왕)

 

서남 해안 일대는 끊임없는 해적의 침탈로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또한 뱃길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는 상선들까지 해적으로 인해 교역을 포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소인, 반드시 해적을 소탕하여 바닷길을 열겠습니다.”(장보고)

 

지금 서남 해안을 장악한 해적은 군소 해적을 평정하고 그 세가 무진주의 관군을 능가한다고 들었다. 내 너에게 해적을 평정할 모든 권한을 주겠노라. 필히 해적을 소탕하도록 하라.”(흥덕왕)

 

소인, 폐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장보고)

 

  2004년부터  2005년 사이에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해신34회 마지막 장면이다. - 벌써 10여년이 훌쩍 지난 과거의 드라마이다. - 국왕으로부터 해적 소탕의 임무를 부여받은 장보고는 본격적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자기 세력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함과 동시에 서남 해안 일대의 해적을 소탕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시대를 읽는 선견지명으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섬사람으로만 나와 있고 출신지가 불분명하지만, 일반적으로 청해진이 설치된 완도 출신으로 추정한다. 자신의 중요한 거점을 자신의 연고지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지상정이라고 볼 때 완도나 완도 인근의 섬 출신일 것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완도의 교통 군사적 입지에 착안해 섬이 많고 해류가 복잡한 완도 지역에 청해진을 설치하지 않았을까.


  그는 20세 전후에 당나라에 들어가 서주 무령군 소장으로 근무하다가 당나라에서 군대를 축소시키는 감군정책을 실시하자 군직을 버리게 된다. 반란 세력이 소탕되고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줄어들자 바로 국가에서 군대 규모를 축소한 것이다. 당나라 자국 출신의 군인들도 실업자가 되는 마당에 외국인 출신의 군인이 설 땅은 더욱 좁았을 것이다. 살아남는다 해도 미래에 대한 희망은 없지 않았을까. 이럴 때 그는 군대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평화가 찾아오면 상업(특히 국제 무역)이 발달한다는 점에 착안한 듯, 반란이 끝난 산둥성 일대 신라인들의 네트워크와 자신의 군대 생활을 통해 얻게 된 리더십과 인맥을 활용, 신라와 당나라의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의 산동성 적산포에 법화원을 세워 부를 축적하게 되고,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생존의 위기에 빠졌거나 실업자가 되었을 다수 군 출신 인물들을 포용하고 일자리를 주면서 확고한 기반을 갖게 된다. 이에 재당 신라인들, 요즘으로 치면 당나라 한인타운의 리더로 떠오른다.




복원된 장도 청해진유적지


  자신의 군대 경험과 무력, 당나라와 신라를 연결하는 무역, 신라인들이 모여 사는 신라방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지금의 완도에 설치한 조직이 바로 청해진이다. 청해진 설치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보고가 확보한 수많은 기반들이 더 큰 이익과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청해진 설치의 목적이 명분상으로는 해적 소탕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당~신라~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무역의 전제 조건이었을 뿐이며, 장보고는 막강한 군사 조직을 휘하에 두고 경제적 이익이 막대한 중개무역을 직접 주관한다. 청해진 설치의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다. 안정된 중개무역을 통해 거의 독점적으로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수준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군인들을 사실상 자기 사병으로 부릴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경제력 덕분이었으리라.

 

  당시 신라 국왕과 정부는, 남해안 일대의 해적 때문에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고 경주로 오는 무역선이 자주 약탈당함으로써 중국산 자기와 사치품들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해안 일대를 통제할 군사 조직이 필요하였으므로,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를 쉽게 인정해 주었다.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을 주관할 만한 노하우와 인적 기반을 가진 인물이 그밖에 없었던 셈이다

더구나 이미 상당 기간 신라 중앙 정권은 진골 귀족들의 왕권 쟁탈전으로 죽고 죽이는 혼란이 계속되고, 뭔가 장기적 비전을 갖고 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보니, 자신들의 공통된 이익을 위해 신분은 떨어지지만 능력 있는 인물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장보고기념관 내 장보고무역선 


  장보고는 젊은 시절의 전환기에 시대 변화의 핵심을 찌르고 들어가 성공했다. 당시 시대의 흐름과 욕구를 잘 파악하고 발 빠르게 대처한 천재였던 셈이다.

  결국 국가의 배후 지원까지 등에 업고 나선 장보고는 자신의 원래 거점이었던 중국의 산동성과 한국의 남해안,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의 중심에서 국가가 부럽지 않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장보고의 청해진 조직은 공식적인 국가 조직이 아니라 장보고 개인의 역량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사조직으로, 군사 조직과 무역 조직, 당나라와 일본의 신라인 주거지를 연결하는 자치조직체로서 독립적인 행정구역을 형성한 일종의 군산복합체 종합상사로 평가받는다. 요즘에는 벤처의 원조로서, 시대적 흐름을 꿰뚫고 이를 앞서나가 개인적 역량에 의해 성공 신화를 일구어낸 대표적인 역사 인물로도 이야기된다

  

  이렇게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신라 왕실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피신하였다가 다시 장보고의 군사력에 힘입어 경주로 쳐들어가 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장보고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세를 과시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김우징(신무왕)이 왕이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그 대가로 김우징의 아들(뒤의 문성왕)과 장보고의 딸을 혼인시키기로 한 약속. 그러나 김우징이 왕이 되고 곧 이어 사망하면서 그 약속은 다음 왕이 된 아들 대에서 지켜지지 않았다. 문성왕이 자기 아버지의 약속을 진심으로 지키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의 개인적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왕은 물론 왕비도 진골 귀족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는 신라 년의 전통을 깰 수는 없지 않았을까.

  신라 외곽의 평민 출신으로 일약 스타가 된 장보고는 왕실과 혼인함으로써 중앙 정계에 본격 진출하고자 하였지만, 꽤 오랫동안 폐쇄적 신분 의식을 갖고 있던 신라의 귀족들은 이때만은 단결하여 암살자(염장)를 보내 장보고를 죽이게 된다.

 

  장보고, 그의 지향이 중앙 진출에 있지 않고, 끝까지 독자적인 세력화를 추구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됐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두 세대 뒤에 현실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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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혹한 시기이다. 최악의 경제 위기에, 미래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생존, 저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수의 통치권자들과 그 아류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아이디어와 창의성, 그리고 도전정신이 필요한 때이다.

 

  역사는 단지 교훈만 주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간접 경험의 집적물이다. 우리가 직접 겪지 못한 숱한 사례들이 역사 속에 풍부하게 살아 있다. 100년을 살지 못하는 한 인간이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수만 명의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역사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배우라고 하지 않았나.

 

  장보고에 대한 진지한 분석을 통해, 어려운 시기에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선구적으로 개척하여 성공한 그의 용기와 불투명한 미래를 향한 도전 정신, 해상을 장악하고 유지한 리더십과 통치력, 그리고 당시 중앙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는 한계점까지 참고해 볼 때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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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해진 터가 남아 있는 섬, 장도 청해진유적지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809 )


  장보고의 청해진 터가 남아 있는 섬, 장도는 2010년대의 지속적인 발굴을 끝내고 복원 공사도 완료되었다. 밀물 때에는 바다에 잠기고 썰물 때에는 섬까지 길이 열리는 장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장도 주변의 갯벌에는 당시에 진의 보호를 위해 설치해 놓은 방어용 목책의 흔적도 남아 있다. 지금은 외성문과 내성문, 이 문들을 연결하는 토성, 그리고 성 내부의 우물인 청해정 등이 복원되어 있다.

  

  장도를 둘러싼 토성 성벽을 거닐며 주변 바다를 바라보라. 북쪽 사후도, 동쪽 고금도, 남동쪽의 신지도, 남쪽의 완도읍 일대, 신지도와 연결한 신지대교 등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곳이니, 이곳이 정말 당대의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이곳 장도는 당시 청해진의 전초 기지 혹은 거점의 역할을 했을 것이며, 실제 청해진은 아마 최소한 장도를 포함한 주변 3km 일대에 펼쳐져 있어 1만여 명이 주둔한 군부대와 배후의 시장, 상업도시가 밀집한 요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완도의 맛집

모래뜰(신지도 위치, 모듬회, 전복회, 061-552-4015)

어가(완도읍내 위치, 어가정식, 생선초밥, 복요리, 061-555-0305)

대도한정식(완도읍내 위치, 한정식, 061-553-5029)

대복횟집(완도읍내 위치, 활어회, 복탕, 061-554-3341)

 

완도의 숙박

바다향기펜션(신지도 위치, 061-552-7977, www.badahgp.co.kr)

명사십리해수욕장 바로 앞에 자리한 펜션.

 

하늘정원펜션(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061-555-0400, www.완도하늘정원펜션.kr)

완도읍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펜션

 

완도관광호텔(완도군 완도읍 가용리, 061-552-3005, www.wandohotel.com)

시애틀모텔(완도군 완도읍 가용리, 061-55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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