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첨성대의 수수께끼 -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가 :: 대한민국 나그네의 여행, 맛집, 답사이야기

 

첨성대의 수수께끼 -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가

 

10월 핑크뮬리가 한창일 때의 풍경

 

첨성대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

 

첨성대는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중 하나이며 국보 제 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첨성대를 한번쯤은 실물로 보았을 것이다.

 

20169, 진도 5.8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 첨성대의 균열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문화재 관리 당국은 첨성대 위쪽 정자석(井字石)이 북쪽으로 3.8cm 정도 이동했을 뿐, 큰 훼손은 없었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첨성대는 오늘날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식될 정도로 전국구의 명성을 갖고 있는 유명한 문화유산이다.

숭례문 화재 당시 수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했듯, 만약 첨성대가 붕괴되기라도 한다면 숭례문 화재 때와 비슷한 국민적 감정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첨성대에 대한 역사 기록은 정말 간략하다.

고려 중기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에는 아예 기록이 전혀 없고, 고려 후기 일연의 삼국유사에만 선덕왕 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 는 단 한 줄의 기록만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좀 더 자세한 기록이 있긴 하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구멍을 통해 사람이 속으로부터 오르내리면서 별자리를 관측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천문 관측을 했던 천문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이미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 900년 정도 이상 지난 시기여서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여간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재위(632~647)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높이는 9.07m이며, 2단의 기단부와 27단의 원통형 몸통부, 2단으로 된 우물 정()자 모양의 정상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아래로부터 4.16m 되는 높이에 사방 1m의 구멍이 있다.

실제 가서 보면 중간쯤에 뚫린 구멍이 1m나 된다는 데에 놀란다.

 

첨성대는 이후의 조형에서 상당한 참고가 되기도 한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올라간 모양새는 마치 고려시대의 청자를 연상시키며, 현재의 음료수 병의 모양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바닥은 원형, 꼭대기는 네모난 모양을 함으로써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모양이 대단히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후세 사람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조형물이기도 한 셈이다.

 

 

첨성대는 일반적으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통한다.

하지만 첨성대가 정말 글자 그대로 천문 관측을 했던 천문대냐 하는 데에는 수많은 의혹들이 있고, 숱한 학설들이 있다.

그간 학자들의 논쟁에 대해서 몇 페이지 분량으로 글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이른바 이 많다.

 

첨성대에 대한 의문과 논쟁

 

 

1960년대까지 첨성대는 천문 관측대로 알려져 왔지만, 이후 하늘을 관측하는 곳으로는 너무 좁거나 불편하고, 당시 경주 시내 중심부에 있었다는 이유로 별자리를 관측하던 곳이 아니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에 전() 서울대 물리학과 남천우 교수는 중간부의 창문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간 다음 내부의 사다리를 한두 번 더 타고 올라가 정자석 위에 넓은 판자 등을 깔고 그 위에 앉거나 누워서 별을 관찰했다고 주장하며, 천문 관측에 크게 불편함은 없었으리라 단정한다.

 

 

그러나 문제 제기는 계속되었고, 첨성대의 독특한 모양을 모티브로, 실제 천문 관측을 한 곳이 아니라 상징적 구조물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철저한 수학적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는 주장도 나왔다.

몸통부의 27단은 27대 선덕여왕을 상징하며, 정자석을 포함한 전체 28단은 동양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던 기본 별자리 28(宿)를 상징하고, 몸통부 돌의 숫자 362개는 1년의 음력 날수를 의미한다는 등의 주장이다.

 

일제강점기 휘문고 수학여행 온 학생들 기념사진 - 이때는 이렇게 첨성대에 자유롭게 올라갔다

 

상징적 구조물이라는 주장 중에는 첨성대가 우물을 상징한다는 견해도 있다.

정상부의 정자석은 우물의 윗모습과 비슷하고, 몸통부는 우물을 땅위에 올려 놓은 듯한 모양인데, 고대사회에서 우물은 풍요, 생산, 생명, 그리고 여성을 상징하니,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다 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연장에서 첨성대는 이 세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우주 우물의 상징인데, 이는 첨성대 자체에 선덕여왕이 하늘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신적 존재라는 상징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다.

비슷한 의미로 여신의 탄생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여신=선덕여왕 이라는 것이다.

 

기능적인 면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춘분, 추분에 햇빛이 창을 통래 바닥에 닿는 모습으로 절기를 관측하는 시설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천문대였다 라고 단순하게 아는 게 낫지, 이들의 학설과 주장을 대하면 대할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미궁에 빠져버려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사실 천문대였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기에,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도 대체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인식하고 있다.

 

계림에서 본 첨성대 야경

 

무엇보다 경주시나 문화재 당국, 혹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봐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천문대임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천문대가 아니라면 이 첨성대의 역사적 가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순식간에 추락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기에 첨성대를 보려고 오는 사람들이 많고, ‘국보로서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천문대가 아닌 그저 상징적 구조물이라면 9m 정도 높이에 불과한 첨성대가 오래됐다는 것 외에 무슨 큰 가치를 갖겠는가.

 

그러니 천문대가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면 굳이 이를 부정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더구나 일본 쪽에서 시비를 걸고 있다면 감정 때문에라도 더더욱 천문대여야 한다는 인식도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견해는?

 

여기서부터의 글은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첨성대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내 나름의 견해이다.

 

첨성대가 천문 관측을 했던 곳이 아니라는 의문이 자꾸 제기되는 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첨성대의 모양과 구조 때문이다.

 

모든 선입관을 배제하고 백지 상태의 눈으로 첨성대를 보았을 때 저 건축물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천문대로 보이는가?

 

나는 아니었다.

 

 

저 건축물이 천문대라면 실제 별을 관찰하는 천문 관측을 어떻게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편리하게 별을 관측할 수 있었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실제 눈으로 보면 저런 건축물에서 정말 편리하게 별을 관측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얼마든지 더 편하게 천문 관측이 가능한 구조물들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모든 의문의 해결은 상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실제로 별을 관찰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

일부 학자들 주장대로 천문대가 맞다면, 당시 관측자들은 출입구도 없고 계단도 없는 첨성대를 매일 사다리 타고 오르내려야 한다. 그것도 깜깜한 밤중에.

내부에 출입구와 계단을 만들어놓으면 충분히 편하게 오르내리며 관찰할 수 있는데, 그 첨성대 중간 윗부분에 뻥 뚫린 구멍을 사다리 타고 올라가 안전시설도 없는 곳에서 불편한 자세로 천문 관측을 해야 한다.

 

 

자칫하면 추락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다. 아니,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매일 밤(EVERY NIGHT) 천문 관측을 목숨 걸고 할 일 있나.

내부에 출입구와 계단을 만들 만한 기술이 없었나.

 

일부 학자는 아래에 출입구를 만들면 전체 구조가 약해져서 아래에 출입구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당시 이미 높이 80m 짜리(현재 아파트 28층 높이)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들었던 신라가 9m 짜리 건축물을 만드는데 출입구를 안 만들었다는 게 말이 되나.

 

, 바닥에 출입구를 만들고 내부에 계단을 설치하면 정상부에서 편안하게 별을 관측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만들지 않고 굳이 중간의 구멍을 통해서 들락날락했다는 것이다.

비상식적인 일이다.

 

 

매일 하는 일에 최대한 안전하고 편하게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상식이다.

전기와 전등이 없었던 시절 어두운 밤에 천문 관측을 한다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천문 관측이 목적이라면 애초에 저런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가장 안정적이고 일반적이라고 생각되는 천문대의 모양은 조선시대 창경궁 관천대관상감 관천대에서 볼 수 있다. 둘 다 주변보다 약간 높은 단을 쌓고, 단 위에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관상감 관천대는 현재 계단이 없지만, 과거에는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천문대의 상식적인 구조는 이런 모양일 것이다.

 

창경궁 관천대 - 천문 관측에는 이런 모양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심지어는 오늘날의 천문대도 기본적으로는 높은 곳에 단을 쌓고 내부에 계단을 설치하여 망원경을 두는 구조를 갖고 있다.

 

(고려 때 천문대로 남아 있는 유적은 정말 천문대였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것도 윗부분은 충분히 폭이 넓게 만들어져 천문 관측에 큰 불편함은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첨성대가 천문 관측의 상징물이든 종교적 의미를 가진 건축물이든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상징물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고 첨성대의 위치에 주목한다.

모든 학자나 전문가들이 첨성대가 본래 세워진 위치에서 이동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데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1400년 가까이 거목처럼 자기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점이 확실하다면 첨성대의 의미나 기능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확실한 점, 이 위치가 주는 의미를 따지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첨성대의 기능과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첨성대는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월성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계림에서 약 300m 정도 거리에 있다. 동쪽, 남쪽으로는 습지가 조성되어 계절마다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봄철의 유채꽃, 요즘에 조성된 핑크뮬리의 군락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런데 신라 때 사용된 궁궐은 초기부터 (반월성이라고도 부르는) 월성이고, 신라가 발전하면서 이 궁궐의 영역은 갈수록 확장되었다.

월성 주변의 동궁과 월지(안압지), 월성 북쪽의 평지에 다양한 궁궐 건축물들이 만들어진 흔적들이 있다.

 

단국대 사학과 전덕재 교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북궁과 남궁을 각각 지금의 월성 바로 북쪽(습지와 꽃밭이 있는 곳, 북궁터), 지금의 월성 남쪽 국립경주박물관 자리(남궁터)로 추정한다.

나도 동의한다.

 

, 오늘날 안압지 자리에 있었던 동궁과 함께 월성의 북쪽과 남쪽에는 북궁, 남궁도 있었다. 월성에는 왕궁이 있었고, 그 주변에 바로 붙어서 여러 궁궐 건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첨성대는 이 월성에서 걸어서 5분여 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따라서 신라 때에는 궁궐(북궁)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거나, 궁궐 바로 바깥쪽에 있었을 것이다.

 

- 지금 월성 바로 북쪽은 한창 대규모 발굴 조사 중인데, 첨성대 주변까지는 안 할 모양이라 좀 안타깝다 -

 

월성앞 봄 유채꽃과 벚

 

왕궁이 있었던 월성은 남쪽에 남천이 성벽을 따라 흐르고 있어 남쪽으로 문을 낼 수가 없다.

따라서 궁궐 정문은 남쪽이 아닌, 평평하게 열린 북쪽으로 날 수 밖에 없고, 이때 북쪽으로 직선거리의 대로가 있었다고 가정하면 첨성대는 그 길 위나 길가에 있었을 것이다.

 

현장에서 월성과 계림, 첨성대의 위치를 대략 가늠해서 신라 때 당시 모습을 추측해 보라.

 

궁궐에서 정문인 북대문을 나오면, 왼쪽으로 왕실에서 신성한 곳으로 보호하는 계림이 있고, 길 따라 좌우측으로 궁궐 부속 건물이나 주요 관청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길 위 혹은 길가 어디쯤에 첨성대가 있다.

 

 

아마 위치상 첨성대 주변에는 국가 기관이나 관청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나 오늘날에도 경복궁이나 청와대 앞 세종로를 따라 주요 국가 기관들이나 시설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궁궐이 가까이 있는데다 주변에는 높이도 제법 높았을 기와집의 여러 궁궐 건물과 관청 건물들이 즐비한 자리에서-주변에는 왕과 왕족들의 무덤도 즐비하다- 9m 높이 첨성대에서의 천문 관측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 천문 관측을 하지 않았더라도 첨성대는 천문 관측과의 관련성을 버릴 수 없다.

후세 사람들이 천문 관측을 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천문 관측과 관련이 있는 관청 앞에 서 있지 않았을까.

 

복원된 월성과 해자

 

결국, 첨성대는 어떤 관청과 관련되어 상징적 의미를 갖고 만들어진 건축물일 가능성이 높다.

왜 요즘에도 국가 기관이나 공공 건축물 앞에 그 기관의 기능과 관련이 있는 상징적 구조물이나 기념물이 서 있는 경우가 꽤 있지 않은가.

 

옛날부터 천문 현상은 정치적, 종교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일식이나 월식, 혜성의 출현과 같은 비일상적인 천문 현상은 꼭 정치, 종교와 관련지어서 해석했다.

때로는 가뭄, 홍수, 지진과 같은 재난이 일어나면 통치자(왕 혹은 왕을 포함한 지배층)의 무능이나 잘못을 나타내는 자연의 경고로도 해석하여 강한 정치적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대한민국도 그런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대규모의 자연재해는 민심의 불안과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재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정권의 명운을 결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첨성대의 건설은 천문 관측을 위한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왕이 천문 현상을 중히 여기고 자연재해를 사전에 감지하여 위험을 막고 정치를 바르게 하겠다는 상징적 의미, 집권자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여왕의 출현, 백제와 고구려 양쪽의 침공과 압박 등 대내외적인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당시 상황에서 왕이 하늘의 뜻을 잘 받들어 통치를 잘하겠다는 표현, 즉 민심의 안정을 위한 상징적 구조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지금은 국민의 여론을 파악하고 국민과 소통하며 국민의 뜻을 통치에 반영하는 것이 집권자의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당시 신라에서는 '하늘의 뜻'을 잘 파악하고 이를 잘 전달하면서 백성을 잘 통치하는 것이 왕의 미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뜻은 구체적으로는 천문 현상으로 나타나고, 하늘의 뜻을 파악하는 방법이 바로 천문 현상의 관찰이기 때문에 굳이 천문대 형상이나 천문 관측의 의미를 담아 만들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첨성대는 천문대 비슷한 모양이되, 실제 별을 관측하는 곳은 아니기에 내부에 출입구와 계단을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대신 좀 더 미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표현할 수 있었기에 지금의 독특한 모양이 되지 않았을까.

 

한편, 첨성대의 '()', 단순히 "본다, 관찰한다"는 뜻의 '()'이 아니라 "우러러본다"는 뜻을 가진 것도 하늘의 존엄성과 하늘의 뜻의 중요성을 표현한 글자가 아닐까 싶다.

단순 천문대라면 조선시대의 천문 관측 기관인 '관상감(오늘날의 기상대 격)'처럼 '()'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말이 참 길어졌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개인적으로 첨성대는 천문 관측을 위한 실용적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도의 상징성을 갖고 선덕여왕이 천문 관측 기관 앞에 설치한, 정치적 의미가 강한 건축물이라고 본다.

또 당시에 거대하게 조성된 황룡사 9층 목탑처럼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이해된다.

 

하지만 어떤 주장이든 첨성대의 기능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나 자료가 새로 나오기 전에는 지금까지의 논쟁은 계속될 것이고, 여전히 여러 가지 의문을 지닌 채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서 어정쩡하게 인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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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인왕동 910-30 |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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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방쌤』 2017.11.28 01:23 신고

    저도 천문관측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농경 위주의 사회였으니 민중들을 위해 날씨를 점쳐주기 위해 이런 곳을 만들었다,,
    그런 민중들에게 정부가 정당성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어주지도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한 번 해봤습니다.^^;;

    • 자유여행인 2017.11.28 06:59 신고

      감사합니다. 학문적으로는 천문관측대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이 많지만, 국민들이나 문화재 당국자들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 합니다.

  2. 영도나그네 2017.11.28 10:11 신고

    햐!
    정말 경주 첨성대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신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첨성대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라갔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구요..
    첨성대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것 같습니다..
    좋은 내용 잘보고 갑니다..

    • 자유여행인 2017.11.28 21:01 신고

      감사합니다. 첨성대 뿐만 아니라 고민거리인 문화유산들이 경주에 좀 있습니다. ^^;

  3. 루비™ 2017.11.28 17:41 신고

    저도 첨성대 사진을 자주 찍는데
    저보다 첨성대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계절에 찍으신거 같아요.
    멋진 자료와 심오한 해석 잘 보고갑니다.

  4. 空空(공공) 2017.12.01 11:43 신고

    첨성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질 읽었습니다
    저도 밤에 한번 가 보고 싶네요^^

    • 자유여행인 2017.12.02 06:49 신고

      ^^
      야경이 괜찮습니다.
      첨성대 바로 앞보다는 주변에서 거리를 두고 보십시오~

  5. 초월자 2019.04.06 08:15

    왜 이런 생각 못하세요?

    중앙 구멍이 첨성대
    그러면 연에서 중앙 구멍 오직 한국
    독특한 구조에 구멍이 첨성대와 방패연 존재

    빌 공 空 뜻 빈공간 하늘 뜻
    이게 첨성대도 빈공간 하늘
    방패연도 빈공간 구멍 중앙 하늘 날림.

    이러니 독창적 이유 설명가능
    한자뜻 확실히 이해.

    아무도 이런 접근 못함 이유
    방구멍이라고 괴상한 용어로 연사용
    이러니 구멍을 단순히 생각
    첨성대 신라

    김유신 연관련 존재
    유사성.
    이야
    우리나라ㅗ학계 연구안하고 문제
    늘상 논문위조조작대필이니 일반시민이 연구
    ㅉㅉ

  6. 첨성대진실 2021.09.12 08:48

    첨성대는 유목민족 이동식 텐트인 유르트를 본떠 만들었습니다.
    경주는 고대 흉노족이 세운 도시로 유목민 입장에서 해석하면 모든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고대 유목민들은 유르트 천장을 우물정자로 만들고 북극성을 관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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