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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여행, 답사이야기/충남 여행, 답사이야기

송산리고분군과 무령왕릉 – 웅진 시기 백제의 문화를 엿보다.


# 송산리고분군과 무령왕릉  웅진 시기 백제의 문화를 엿보다.

 


  송산리고분군은 웅진 시기 백제 지배층의 무덤이 밀집한 곳이다. 그들만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백제 25대 왕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일곱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지만, 더 많은 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 중 역시 유명한 것은 벽돌무덤인 6호분과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은 19717, 5,6호분 침수 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처녀분으로 확인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당대의 대박고분이었다

무덤의 주인공과 명확한 생몰 연대가 확인되었고, 엄청난 양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두고두고 졸속 발굴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비판받고 있지만, ‘졸속 발굴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백제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무덤은 왕과 왕비의 합장묘로, 523년에 왕이 먼저 죽은 다음 왕비가 무령왕보다 3년 뒤인 526년에 죽자, 3년상을 치르고 이곳에 같이 묻었다

시신을 안치한 뒤 입구를 벽돌로 막았는데, 발굴 도중 壬辰年作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어 이 무덤이 무령왕 사망(523) 11년 전인 512년에 이미 축조되거나 준비된 것으로 추측된다


  무덤 내부 크기는 남북 4.2m, 동서 너비 2.72m,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 2.93m이다. 내부 구조를 보면, 자연 암반을 파낸 뒤에 벽돌을 쌓았는데, 입구에서 방까지 긴 연결 통로(연도)를 만들고 안쪽에 부부를 합장한 방을 꾸며 놓았다. , 입구에서부터 아치형 천장의 모양을 하고 있어 벽돌 쌓는 기술이 정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 출토 금제 관식(위)과 베개(아래)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금은제품, 목제품, 도기류, 청동기류 등 다양하며, 모두 1082,906점으로,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  22점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성과를 냈다

무덤을 지키는 짐승인 진묘수(국보 제162), 왕과 왕비의 관모 장식(국보 제154, 155), 지석과 매지권(국보 제163)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들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무령왕 지석(誌石)과 일종의 토지 매매 문서인 매지권(買地券)이다. 41×35cm 크기의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62세인 계묘년(523) 57일에 돌아가시니, 을사년(525) 812일에 장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문서를 작성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 문서는 또 하나의 돌인 매지권인데, 이 매지권에는 돈 일만문과 은 일건을 주고 토왕, 토백, 토부모와 상하 지방관의 지신들에게 보고하여 (왕궁) 서서남방의 땅을 사서 묘를 만들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왕의 무덤을 쓸 때도 땅의 신에게 보고하고 값을 치른 후에 이용했다는 당대인의 관념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당시 현실 세계에서 토지 매매의 관행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추측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한편으로는 생전의 세계와 사후 세계를 구별하지 않는 이른바 계세사상(繼世思想)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 죽은 후에도 현세의 삶을 이어간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뒤에 들어가는 무덤도 현세처럼 똑같이 돈을 치르고 매입을 해야 비로소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기의 집(무덤)이 된다. 이렇게 보면 당시 백제는 이미 토지와 집의 사유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왕족이나 귀족들의 토지 사유화가 심각하지 않았을까.


무령왕릉 발굴 당시의 모습 

 

  그런데 이 매지권을 두고 백제인들의 토지에 대한 애정, 혹은 땅의 질서를 존중하는 종교관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한 무한한 긍정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답사여행 시리즈와 몇몇 글들에 실린 이후 수많은 사람들과 카페, 블로그들에서 비판 없이 반복되고 있다.)

백제와 백제문화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 잘못된 인식을 낳은 경우이다.

 

  매지권의 핵심은 지배층 왕실이 자신들의 살아서의 혜택과 특권을 토지신의 권위를 빌어 죽어서도 누리기 위한 계약서의 일종으로, 형식적이지만 일반 백제인들이 꿈도 꾸지 못할 거금을 지불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매지권의 토지신들은 상하 서열에 중앙과 지방의 구분까지 있다. 현실적인 권력 관계의 반영이다.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분명히 댓가를 지불하고 땅을 사들였다는 것은 이미 땅을 존중하는 관념보다 땅에 대한 소유권의 관념이 더 강해졌다는 것이 당시 현실임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 세련된 표현을 했지만, 알고 보면 땅(토지신)을 현실적 거래 대상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 토지신에게 진짜 돈(오수전)을 지불하고 내 땅을 만든 걸 두고 땅의 질서를 존중하는 종교관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진짜로 땅에 대한 애정을 갖고 땅을 존중했다면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토지신의 땅이지만, 이 땅을 잠시 빌려 쓰겠습니다라고 고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돈 주고 땅을 사들인다는 것은 그 형식이 어떠했든 땅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다. 백제에 대한 애정과는 별도로 사실에 대한 인식은 객관적이고 냉정해야 한다.

 


  현재 무령왕릉은 공개된 후 훼손이 심해져 5,6호분과 함께 영구 폐쇄되어 있으므로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 따로 실물 크기의 무령왕릉 모형 전시관을 만들어 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실물이 아니라 아쉽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고, 고증과 복원이 잘 되어 무덤 내부를 관찰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여행정보

주소: 충남 공주시 왕릉로 37

문의: 공주시 문화재관리소 041-856-0331

기타 정보: 관람시간 9:0018:00 (입장 09:00~17:30), , 추석 명절 당일만 휴원 / 관람료 일반 1,500, 청소년 1,000, 어린이 700/ 주차장은 100대 수용 가능, 주차료 없음

 

송산리고분군 6호분 벽화



가는길

자가용

논산-천안간고속도로 북공주JC당진-대전간고속도로 공주IC를 나와 삼거리에서 시내 방향으로 우회전백제큰다리를 건너 금강을 따라 시내로 진입하면 공산성이며, 이곳 삼거리에 우회전하여 직진하면 송산리고분군에 닿는다.

 

대중교통

공주까지는 서울강남고속버스터미널(1688-4700, www.exterminal.co.kr)에서 공주 행 고속버스(35~40분 간격 운행, 1시간 50분 소요, 이후 심야 우등 고속 2회 운행)를 이용.

대전 동부시외버스터미널(042-624-4451, http://cafe.daum.net/tjterminal/)에서 공주 행 시외버스(40분 간격 운행, 1시간 소요)를 이용, 공주에서 하차

 

공주시내에서는 버스종합터미널 앞이나 공산성 앞에서 101번 시내버스를 이용, 무령왕릉 앞에서 내린다.

 

맛집

공주 시내 공산성 건너편 식당가의 새이학가든(041-855-7080)공주식 따로국밥으로 60년의 전통을 가진 대표적인 맛집이다. 요즘은 돼지석갈비 메뉴도 밀고 있다.

인근의 연문대가(오채비빔밥, 041-856-0757), 고마나루돌쌈밥(쌈밥, 041-857-9999), 금강 건너 월송동의 전통궁중칼국수(바지락칼국수, 041-858-2397)도 괜찮다.

 

숙박

공주는 숙박시설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공주한옥마을(041-840-8900, http://hanok.gongju.go.kr/flow/ ) 은 매달 1(1일이 휴일이면 2) 오후 2시부터 다음 달 숙박 예약을 인터넷으로 받는다. 숙박하려면 이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다.

 

기타 시내의 호텔과 모텔 시설 등을 이용한다.

금강관광호텔 (041-852-1071, www.hotel-kumkang.com)

모텔큐(041-856-5516)

클리오모텔(041-856-9114)

버킹검모텔(041-856-7932)

르네상스모텔(041-852-0901)

 

Tip

고분군 너머 금강 가에 곰나루국민관광지가 있다. 금강가의 모래벌과 소나무숲이 잘 어우러져 있으며, 산책길이 잘 되어 있다. 특별나지는 않으나, 가족 단위로 가볍게 들러 강바람을 즐기는 정도라면 들러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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