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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 답사 이야기/경주 문화유산 답사, 여행

경주 남산 석가사지와 불무사지

 

# 경주 남산 석가사지와 불무사지

 

 

 

 

"폐하도 진신석가를 만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서기 699, 신라의 효소왕은 당나라 황실의 복을 빌려고 지은 망덕사의 낙성회에 참석하였다. 왕실이 직접 돈을 내서 만든 절이니 생색도 낼 겸 시간을 내서 화려하게 행차했을 것이다.

 

그때 행색이 거의 거지꼴인 승려 한사람이 몸을 구부리며 들어와 왕에게 요청하였다.

 

빈도도 이 재에 참석시켜 주십시오.”

왕은 끝자리에 앉도록 허락하였다. 마음속으로야 탐탁치 않았겠지만, 겉으로는 왕의 관대함을 보여 줘야 했을 것이다.

 

행사가 끝나자 왕은 가벼운 마음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파암에 있습니다.”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게나.”

 

그러자 승려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도 남들에게 진신 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한 방 맞은 듯 놀라서 당황해하는 왕 앞에서 몸을 솟구치더니 하늘에 떠서-무슨 아이언맨처럼- 남쪽으로 사라졌다.

 

비파골의 이름을 낳게 한 비파암

 

왕은 놀랍고 부끄러워서 사람을 시켜 빨리 쫓아가도록 하였다.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진 승려를 어떻게 쫓아갔는지는 모르지만, 그 승려를 놓치면 안 되는 추적자는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을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실무자는 피곤하다.

아마 날개 달린 천마라도 타고 추격한 모양이다. 결국 승려를 찾아냈다.

 

승려는 망덕사에서 바라보는 남산을 넘어가 삼성곡 어느 바위에 지팡이와 바리때를 벗어놓고 사라져버렸다. 오랜만에 하늘을 날았더니 힘들고 몸에 땀이 나서 벗어놨는지, 아니면 일부러 흔적을 남기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추적자는 이를 확인하고 돌아가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비파암 아래에 석가사를 세우고, 그가 사라진 바위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나누어주었다.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 감통 편에 있는 이야기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효소왕과 이름 없는 승려의 이야기가 전하는 현장, 망덕사지

 

설화에 숨은 시대 현실과 비판 의식

 

왕이 일반인을 향해 날 만났다는 걸 말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불교와 관련된 설화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럴 때 등장하는 일반인은 보통 가난하거나 볼품없이 생긴 사람, 혹은 아이들이다. , 대개 사회적 약자로 보이는 사람들인 셈.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갑자기 그가 왕도 석가(혹은 보살)를 만났다는 걸 말하지 말라고 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왕이 당황해서 쫓아가지만 -물론 왕의 체면이 있지 자기가 직접 쫓아가지는 않는다- 그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차적으로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종교적 권위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보통 종교계 쪽에서 나온다. 최고의 현실 권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에서 왕은 항상 자신을 낮추고 종교계에 무엇인가를 베푼다.

 

하지만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화려하고 겉치레가 많아진 왕이라는 현실 권력에 대해서 스스로를 낮추고 본질을 추구하라는 일반인 혹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다. 약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우습게보지 말라는 의미에 더하여 종교에 현실의 권력 관계가 반영되는 세태를 비판한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신분의 격차가 불교에 그대로 반영되어 불교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알고 보면 이 초라한 행색의 승려가 했던 말은 왕에게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당시 망덕사 낙성식에 참여한 어느 승려가 실제로 했던 비판적인 목소리가 반영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남산 능선에서 내려다본 비파골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기를 온몸으로 겪은 동시대 사람이다.

그것도 세속을 초월해 도만 닦은 승려가 아니고 왕에 의해 국사의 자리까지 올라간 승려이다. 몽골 침입에 온 국토가 유린당하는 모습과 동시에 강화도에 피난 간 최씨정권과 불교계가 강화도에서 호의호식하며 온갖 행사와 이벤트를 벌이면서도 정작 몽골군과 정면 대결해서 싸우지는 않는 모습을 보며 당시의 현실 권력에 비판적인 의식을 갖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 이야기가 실린 감통 편의 몇몇 이야기들은 은근히 현실 정치권력과 불교계의 허위의식을 비판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 곳곳에서는 신라 때의 빈부격차와 화려한 면에 가려진 어두운 면이 자주 고발되고 있다.

 

<삼국유사>가 교과서 표현처럼 단순히 고려 후기 몽골 침입에 맞서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한 역사서만은 아닌 셈이다.

 

, 물론 이 본질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변질시켜서라도 기어이 자기 과시욕을 드러낸 왕도 있다. 조선시대 세조다.

 

강원도 오대산에서 동자로 변신한 문수보살을 만나 피부병을 치료하지만-여기까지는 위 이야기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문수보살이 자기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사라졌으니까-, 상원사에 숨은 자객을 고양이가 튀어나와 알려줘서 암살을 피하는 기적을 만난다. 본래 이야기에 덧붙여진 이야기이다. , 자기가 천명을 받아서 쉽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어느 소나무가 자기 지나갈 때 알아서 팔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정2품의 파격적인 벼슬을 내린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이 소나무에 자객이 숨어 있는 것을 소나무가 가지를 들어 숨은 자객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어느 이야기든 본질은 같다) 이런 파격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은 왕 이외에는 없으니 국왕의 권위와 권력을 한껏 과시한 셈이다.

 

불교 사찰과 관련된 스토리에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 스토리가 포함되었으니, 세조의 이런 자존감과 과시욕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물론 불교를 철저히 억눌렀던 억불정책의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불교를 보호한 왕이었으니 이런 스토리를 넣어도 불교계가 뭐라고 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래서 오늘날 남아 있는 세조와 불교계와의 스토리에는 왕이 자신을 낮추거나 고개를 숙이는 예가 없다. 항상 불교계 위에 서서 불교계에 뭔가 특혜를 내리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왕의 권위와 권력을 빌려서라도 생존이 절박했던 조선시대였으니 당시 불교계는 이런 이야기 구조를 인정하지 않았을까.

 

하여간 <삼국유사>에 실린 이 이야기는 왕과 불교계, 그리고 당시 시대 현실을 어느 정도 통찰할 수 있는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왕권과 친밀하고 가까우면서 지배세력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때로는 왕권을 견제하거나 비판하기도 하고 당시 신라의 일반 백성들과의 연계 고리 역할도 하는 불교계의 모습도 담겨 있다.

 

초라한 승려로 변신한 석가의 흔적이 마지막에 머무른 곳이 당시 신라인들의 성지이자 마음의 고향이랄 수 있는 남산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신라 민중들이 어렵지 않게 불교를 가깝게 대하고 그들의 신앙심이 골짜기마다 곳곳에 펼쳐진 경주 남산.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루트(남산 동쪽과 토함산 일대)에 왕권과 왕실, 신라 지배층의 힘과 영향력이 표현된 사찰과 문화유산(불국사, 석굴암,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신라 및 통일신라 여러 왕의 무덤 등)이 많이 남아 있다면, 경주에서 양산으로 가는 남산 서쪽 루트는 상대적으로 토착적, 민간적 요소가 강한 문화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바로 이 남산 서쪽 골짜기, 석가의 흔적이 머무른 곳이 지금의 석가사지와 불무사지이다.

 

                                                        석가사지 주변 탑의 부재들

 

 

남산 석가사지와 불무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고행길이다

 

초라한 승려로 변신한 석가가 망덕사에서 남산을 넘어 약간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골짜기는, 이 남산 서쪽의 숱한 골짜기들 중 현재 비파골이라 불리는 골짜기이다.

왕이 승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을 때 승려가 비파암에서 왔다고 했는데, 그 이름을 따서 비파골이라 했던 것 같다.

 

석가사지와 불무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고행의 길이다. 길 찾기가 어렵다. 개인적으로 작정하고 찾아갔어도 두 번을 찾지 못하고 실패했던 길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사찰들이 지금은 폐사된 지 오래인데다 복원도 되어 있지 않아 길의 흔적 자체가 상당히 지워져 있다. 그래서 숲이 무성하게 우거지는 5~10월 정도까지는 접근도 어렵다. 그러니 겨울이나 초봄에 찾아가야 한다.

 

이곳에 가려면 남산 서쪽에서 가장 유명한 삼릉골을 지나 용장4리 버스정류장을 찾아가야 한다.

그 건너편이 비파골 입구이다. 비파골 입구에서 길을 더듬어 골짜기를 타고 오르다 길이 헷갈리는 지점들이 나타난다. 보통은 오른쪽으로 보이는 희미한 흔적의 길로 가야 한다.

실수로 왼쪽 길로 접어들면 비파골 3층석탑(정식 명칭은 비파곡 제2사지 삼층석탑)을 만날 가능성이 높은데, 이 탑을 지나면 능선을 따라 정상부로 올라간다. ,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놓치지 않고 석가사지를 찾아가려면 갈림길이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아무런 안내판과 표시도 없는 희미한 길을 따라 가다 잘 보면 우측으로 밑둥을 잘린 나무가 작은 계곡을 건너 걸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나무를 찾으면 놓치지 않고 석가사지에 갈 수 있다.

이 나무가 걸쳐진 작은 계곡을 건넌다. 물이 흐르지 않는 아주 작은 계곡이라 그냥 걸어서 건너가면 된다. 그러면 역시 희미하게 길이 이어진다.

 

석가사지는 길을 따라 가다 경사가 급해지면서 사방의 조망이 트인 시점에 나타난다. 남산 정상에서 흐르는 능선과 이 능선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들이 한눈에 잡힌다. 사실 공식적인 명칭은 비파곡 제3사지이다. 이곳이 석가사지라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가파른 경사면에 지어진 사찰이었을 듯 돌로 쌓은 축대가 남아 있다. 이 돌 축대가 눈에 잘 띠기 때문에 이를 통해 이곳이 석가사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일대 경사면 곳곳에 석탑의 옥개석과 몸돌로 보이는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대개 주변을 봐선 그리 큰 사찰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이곳에 탑만 있었고, 실제 사찰 건물은 그보다 아래쪽 비파암에 가까운 바위군 아래의 사찰터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비파암 아래에 석가사를 세웠다고 하니 비파암 아래의 사찰터가 진짜 석가사지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어느 쪽이든 본격적인 발굴이 되어야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가가 지팡이와 바리때를 벗어놓고 사라진 바위 위에는 불무사가 있었다 한다. 이 불무사지는 석가사지 오르는 길가의 왼쪽 바위군 옆 희미한 길을 따라 올라가야 닿을 수 있다. 길을 잘못 가면 두 손 두 발 다 쓸 수도 있다.

 

불무사지

불무사지의 기와 파편들

전망 좋은 한 무더기의 바위군이 불무사지인데, 이 바위에 사찰 건물이 올라 타 있었다는 것이 얼핏 납득이 가지 않기도 한다. 전남 구례 사성암처럼 바위에 기둥을 박거나 바위에 기대어 기둥을 세운 다음 사찰 건물을 올려놓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주변에 수많은 기와 파편들이 지금도 흩어져 있어 건물이 있었음은 분명히 확인된다.

 

이 불무사지에서 왼쪽으로 내려다보면 석가사지가 잘 보인다. 석가사지의 전체적인 모양새를 확인하려면 이곳에 오르는 것이 확실하다. 시선을 조금 들어보면 석가사지가 들어선 골짜기와 남산 산줄기들의 모양새가 한눈에 잡힌다.

 

만약 골짜기의 이름을 낳게 한 비파암을 보고 싶다면 다시 산길로 내려와 조금 걸어 내려가서 우측으로 난 길을 찾아야 한다. 불무사지 가는 길보다 찾기 더 어려운데, 일단 길 따라 2분만 오르면 하늘을 뚫고 올라갈 듯한 비파암의 수려한 모습을 대할 수 있다.

 

사실 전체적으로 석가사지와 불무사지를 돌아보면, 주변 풍경은 수려하나 골짜기에 남은 과거의 흔적은 초라하다. 전망은 괜찮지만 주변 산줄기들이 꽉 막혀서 답답하다는 느낌도 있다. 사람의 발길도 워낙 드물어 하루에 한 사람이나 찾아가나 모르겠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남은 이야기는 이 사찰터들의 가치를 입증한다. 그래서 두 번 찾아가는데 실패했어도 다시 길을 찾아 들어가 결국 발견했다. 그러니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바위와 돌 축대, 깨진 석탑의 파편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이만큼이라도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에 보면 탑재가 모두 16매가 확인되었다 하니, 이로 보아 석탑 하나는 복원이 가능할 것도 같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골짜기 작은 사찰터에 탑 하나 세워지면 이것이 포인트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을 모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이 사찰터들이 덜 외로울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도 괜찮다.

정말 관심이 있고 역사서 속 설화의 현장을 찾아가서 그 설화 속 장면을 상상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만 찾아오는 곳, 천년 역사의 흔적을 조용히 감추고 있는 곳, 그래서 나만 아는 곳, 혹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곳으로 남아 있어도 좋다. 그런 곳이 전국에 한두 곳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답사 정보

 

* 차를 갖고 갈 경우 경주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남산 서쪽 길로 가면 경주교도소를 지나 용장4(앞비파마을)에 닿는다. 따로 주차장이 없으므로 주변에 대충 차를 세우고 용장4리 버스정류장 건너편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 대중교통으로는 경주 시내(고속버스터미널, 경주역 등)에서 500번대 버스(봉계, 내남 행)를 타고 삼릉, 경주교도소를 지나 용장4(앞비파마을) 정류장에서 내린다. 버스정류장 건너편에 최근에 지은 기와집이 있는데, 이 기와집 옆 작은 계곡 사이로 길이 있다. 이 길 따라 들어가면 비파골이다.

 

* 길을 알고 찾아가면 1시간이면 충분히 들어가지만, 잘 모르고 헤맬 경우 시간이 2배로 많이 걸릴 수 있다. 본문에서 말한 대로 5~10월에는 가지 말자. 안 그래도 길이 희미한데, 나무가 무성해지면 찾아가기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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